2021. 12. 12. 00:21ㆍk-pop review & essay
시간이 지났다면 변화는 필연적이다. 또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이 시장 흐름의 일부라면 그것은 필연을 넘어 필수이다. 그래서 어떤 가수를 오랜 시간 좋아했다면 여러 번이고 변화를 맞이했을 거다. 그게 당연한 우리에겐 변화도 하나의 즐거운 콘텐츠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다 안다. 그 안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뭔가를 발견했을 때 또한 그것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 인다. 우리는 수많은 변화를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정말로 사랑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
당신의 혜성은 오르트구름이 되어: 윤하 [YOUNHA 6th Album 'END THEORY'] 리뷰
01 P.R.R.W. [★]
02 나는 계획이 있다 [★★]
03 오르트구름 [★★]
04 물의 여행 [★★]
05 잘 지내 [★]
06 반짝, 빛을 내
07 6년 230일
08 Truly
09 별의 조각 [★]
10 하나의 달 [★]
11 Savior
*앨범 리뷰의 별점은 [ ], [★], [★★] 3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간에 휩쓸려 가지 않고 남은 무언가
한 곡 한 곡을 분석하기보다는, 그냥 이 앨범의 존재로부터 느껴지는 전체적인 감상이 있어서 짧은 얘기를 써보고 싶다. 앨범을 듣자마자 너무 좋았다. 곡 자체가 모두 좋고, 특히 내 취향에 맞는 트랙들이 앞쪽에 배치되어 있어 첫인상이 더 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이유는, 이 노래들이 지나간 시간들의 기억을 갑자기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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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다, 오디션, 앨리스, 혜성, 파란 빛 레몬, 오렌지 첫사랑, 추억은 아름다운 기억, 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맑음, 텔레파시, 오늘 헤어졌어요, 편한가봐, 꿈속에서, People, 크림소스 파스타
이 곡들은 내가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에 나왔던 노래들인데, 당시 아이돌 음악 외에는 거의 듣지 않았던 내가 좋아했던 몇 안 되는 非아이돌 곡들이기도 하다. 물론 윤하 자체가 너무 유명한 가수이고 몇몇은 대히트송이라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아무튼 그때의 나에게는 아이돌 음악 외에서도 취향을 찾아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우선 '혜성', '오디션', '비밀번호 486'과 같은 빠르고 밝은 록 계열 노래들을 가장 먼저 접해서 좋아하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 후에 '기다리다'와 같은 발라드 곡도 듣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듯 그때도 나는 발라드를 잘 듣지 않았었지만, 윤하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슬픈 노래에서도 목소리가 표현하는 감정이 너무 깔끔하고 담담하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후 윤하 노래들을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앨리스', '오렌지 첫사랑', '크림소스 파스타'와 같이 적당한 리듬감을 가진 미디엄 템포 곡들을 가장 좋아하게 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밝고 리듬감 있는 곡에, 텁텁함 없이 맑은 정서, 경쾌한 감정선의 목소리가 만드는 윤하의 아이덴티티를 좋아했다. 하지만 사실 이후부터는 이러한 특색의 새로운 가수는 찾기 어렵기도 하고, K팝의 자극적인 속도감에 익숙해지게 되기도 하면서, 자주 찾게 되지는 못한 스타일의 노래들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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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발매된 이번 정규 6집 [END THEORY]에서, 위의 노래들을 듣던 때의 감성과 향수가 떠오른다. 그냥 듣자마자 1번 트랙부터 느껴지는 반가움을 어케 설명해야 될지... 아마도 그냥 이 시간의 기억을 함께했던 사람들에게만 전달되는 느낌일 것이다. 물론 10년 전과 음악 스타일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분명 시대에 발맞춘 변화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작은 한 구석의 갬성이 커다랗게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매우 매우 개인적인 감상에 기반한 글이라는 뜻,,, )
그래도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기엔 너무 추상적일 수 있으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겠다. 정규 5집과 비교해 보면, 이번 앨범에 내가 왜 이렇게 강하게 반응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루비룸의 몽환적인 특색을 가미해 새로운 스타일에 집중한 5집은 개별 곡들이 매우 좋고 사용된 악기도 이전과는 색다른데(굳이 따지면 6집 수록곡인 '6년 230일'은 이 앨범의 전체적 분위기에 가까운 느낌인 듯), 이런 트렌디한 요소는 오히려 내가 최근 더 선호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주로 기존 윤하 노래들처럼 뚜렷한 기승전결을 강조하기보다는, 기승전결을 하나같이 촉촉하게 적셔서 평탄하게 누르고(물론 아닌 노래도 있음) 새벽 감성으로 은은한 빛을 내는 곡들이다.
반면, 이번 6집은 거의 10년 전에 나왔던 4집과 그 이전의 색깔이자, 윤하의 특색 중 에너제틱한 면을 꺼내 강조한 곡들을 전면에 세운다. 예전의 노래들처럼 두근두근하게 달려가는 록적인 구성이 강조되는 곡이 많고, 또 이러한 점을 더욱 폭발력 있고 트렌디하게 터뜨리는 도구로 EDM 요소들이 더해졌다. 물론 컨트리 느낌이 두드러지는 '오르트구름'이나 발라드인 타이틀곡 '별의 조각'도 대표곡이지만... 전반적으로 내가 인상깊었던 부분은, 기존의 경쾌한 감성 기조는 이어가면서도, 또 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변화도 주며 자연스럽고 멋지게 아이덴티티를 확장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은 윤하의 색깔을 갈고 닦았지만, 어느 것 하나 휩쓸어 보낸 것은 없는 것 같다. 그 점을 이 앨범이 보여주고 있다.
시간과 우주를 노래하는 이야기
절묘하게도 이 앨범의 주제는 시간이다. 내가 이 노래들을 들으며 지나간 시간을 떠올린 동안, 시간이란 메시지가 흐르고 있었다는 점도 조금 짜릿한 부분이다. 이 앨범은 흐르는 시간과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사색을 담아내고 있으며, 그 사색의 끝에서 도달한 결론이 희망적인 앨범 기조로 녹아들어 있다. 한 곡 한 곡을 상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여정이 될 것 같아 요약하자면, 앨범 소개글에서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딛고 지내온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정확히는, 사랑하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라는 것이다. 과거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다가올 끝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며, 그 고민을 마쳤다는 듯 확신적으로 전진하는 노래들이 그 메시지를 표현한다.
녹이 슨 심장에 쉼 없이 피는 꿈
무모하대도 믿어 난 -오르트구름
또 이러한 이야기들을 우주의 이치, 불가항력 같은 속성과도 결부지으며 메시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앨범 설명을 보면 앰비언트 사운드를 강조하는 곡이 많은데, 특히 '하나의 달'은 이 때문에 영화 음악 같은 느낌을 준다. 이전에도 윤하는 '혜성', '슈퍼소닉'처럼 우주적인 소재를 사용했었는데,이번 앨범에서 다시 한 번 그 세계를 확장한 듯하다. 특히 와닿는 것은 타이틀 '별의 조각'의 가사다. 우리는 이미 떨어진 혜성처럼 살아갈 별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이 순간을 대하는 것은 우리가 정하는 감정이기에, 살아가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선택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풀어낸 노래다. 운명론적이기도 하지만 주체적이기도 하다. 윤하라는 가수를 알게 된 뒤 아주 오랜 시간 후에 다시 같은 모습으로 마주해서 반가웠던 이 노래가, 지나간 시간과 현재를 어떻게 잘 대하며 살아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왠지 모르게 매우 절묘한 감성 포인트로 다가온다.
태어난 곳이 아니어도 고르지 못했다고 해도
내가 실수였다 해도 이 별이 마음에 들어
언젠가 만날 그날을 조금만 기다려줄래
영원할 수 없는 여길 더 사랑해 볼게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사랑해 버린 모든 건
이 별에 살아 숨을 쉬어 난 떠날 수 없어
낮은 바람의 속삭임 초록빛 노랫소리와
너를 닮은 사람들과 이 별이 마음에 들어 -별의 조각
아무튼
데뷔한 지 15년 정도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처음과 같이 희망이 살아 숨쉬는 노래들로 돌아와 즐거운 마음뿐이다. 많은 고민이 들어간 앨범으로 느껴지는데, 그 고민이 끝이 이런 노래들이라면 아티스트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지면서 행복한 덕질이 가능하겠다 싶은 작품이다. 뭐랄까...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모습과 아티스트의 소울이 맞닿아 있다는 것은 특별하게 허락되는 조합인 것 같다.
물론 내가 '이래서 이 앨범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티스트가 언제나 처음 모습 그대로 변치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변한다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다만 그 변화 속에서도, 그냥 이렇게 항상 진심이 담겨 있었으면 좋겠다. 아티스트의 매 순간은 지금도 어느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겨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뭐 이런 곁다리 같은 생각들이 이 앨범이 더욱 좋아지도록 하는 총체적인 감상을 만들었다.
아무튼 그렇다. 혜성은 이렇게 14년을 떠돌다 별의 조각이 되었고, 혜성이 찾아다니던 '그대'는 오르트구름이 되었다. 명확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고 싶어 했던 풋풋한 혜성은, 이제 보이지 않는 오르트구름이라도 찾아서 태양계 밖으로 박차고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시간의 흐름이 완성하는 인간의 생각은 이렇게 멋진 기록으로 남기도 한다. 이래서 덕질은 재밌다.
+) 2022. 04. 01
리패키지 타이틀곡 '사건의 지평선', 이 곡이 이 앨범의 색깔과 메시지의 정점을 찍는 것 같다. 이 노래 너무 좋다...
#토비레코드: 주로 K팝 얘기하는 블로그 [ rtbs.tistor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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