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13. 21:01ㆍk-pop review & essay
2012년을 떠올려 보면 첫사랑이란 키워드로 만개한 해였다. 국내 영화 <건축학개론>,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드라마 <응답하라 1997>, 버스커버스커의 '첫사랑', '벚꽃 엔딩' 같은 곡들이 수록된 1집 앨범 등 몽글몽글함이 꽃피는 콘텐츠들이 어딜 가나 입에 올랐다. 아이돌 노래에서는 학교 배경의 첫사랑 추억 회상 노래인 써니힐의 'Goodbye To Romance', 걸스데이의 '나를 잊지 마요'가 이 해 발매였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기에 딱히 추억에 젖을 만한 인생 경험은 없었지만... 그 영화나 드라마,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예쁜 서정성들은 왜인지 없던 추억도 있었던 것만 같이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좋았다.
영화에서 건축학개론 수지가 국민 첫사랑이 된 동안 K팝에서 첫사랑의 아이콘은 공석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f(x)가 '첫 사랑니 (Rum Pum Pum Pum)'와 이 곡이 있는 앨범 [PINK TAPE]로 그 모티브를 선점했다. 하지만 이 곡에서 익숙하게 추억을 안겨주는 복고적인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첫사랑의 대명사처럼 어두운 긴 생머리였던 크리스탈과 설리는 빨간 머리, 단발이 돼서 돌아왔다. 아련하기는커녕 이국적이고 낯선 곡조와 구성, 향수 어린 과거 기억이 아니라 오지 않은 미래를 보며 노래하는 가사는,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공유되는 정서를 향한 색다르다 못해 반항적인 접근이었다.
매니악한 첫사랑의 아이콘, 이 모순적인 만남은 매니악도 첫사랑도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달콤쌉쌀한 조합이다.
이렇게도 매니악한 첫사랑의 아이콘 {f(💗)=PINK TAPE}: f(x) 정규2집 앨범 리뷰
01 첫사랑니 [★★]
02 미행 [★★]
03 Pretty Girl
04 Kick [★]
05 시그널 (Signal) [★★]
06 Step [★]
07 Goodbye Summer (f(Amber+Luna+Krystal) (Feat. D.O. Of EXO-K)
08 Airplane [★★]
09 Toy [★★]
10 여우 같은 내 친구 (No More) [★]
11 Snapshot
12 Ending Page
*앨범 리뷰의 별점은 [ ], [★], [★★] 3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온 지 10년이 다 돼 가는 앨범을 이제 얘기하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일렉트로닉한 노래에 꽂혔다. 그리고 그런 K팝 팬이라면 입이 아프게 [PINK TAPE]를 얘기할 수밖에 없다.
이 앨범의 12곡은 몇몇 환기구 같은 역할의 곡들을 제외하고는 일렉트로닉한 하나의 에너지로 뭉쳐서 막힘없이 달려 나간다. 앨범 설명에서도 많은 곡들의 장르를 '일렉트로닉 댄스'라고 정의하며 이 에너지에 집중하고 있다. 대체로 전자음으로 빽빽한 앨범 중간에서 완전히 어쿠스틱한 'Goodbye Summer'로 숨통 한 번 틔어 주고, 이지리스닝 팝인 '미행'과 '여우 같은 내 친구' 같은 곡들이 앨범의 앞뒤쪽을 마크하며, 나머지 곡들은 타협의 여지 없이 골라 잡은 EDM 장르의 속성들로 꽉꽉 채워져 있다. 곡들 자체도 좋은데 심지어 첫사랑을 노래한다는 테마 하에서 이렇게 촉촉함 없이 살벌하고 차가운 소리들과 직선적인 멜로디들을 차용하는 건 너무 새롭다. 또 이걸 아이돌스러운 예쁜 목소리들과 조화시키는 것도 산뜻하다. 이렇게 만든 쿨하면서도 러블리한 음악 색깔은 f(x)표 하이틴의 성격이기도 하고, 세계 시장의 일렉트로팝 트렌드를 K팝의 성격으로 활용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전에 쓴 에스파의 [Savage] 앨범 리뷰에서 전자 악기가 전하는 매력이 가득하다는 표현을 썼는데, [PINK TAPE]가 K팝에서의 그 조상격이 아닐까 싶다. 물론 차이는 있다. 에스파의 앨범이 K팝을 힙합에 섞어 먹고 EDM에 비벼 먹은 역사를 굽이굽이 거쳐 보내며 202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올 수 있었던 퓨전 한상차림이라면, 에프엑스의 핑크테이프는 2013년에 나왔지만 2021년에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은, 원재료의 맛이 세련되게 느껴지는 정식 맛집 그 자체다. 송캠프 방식을 통해 다양한 최정예 프로듀서진이 각 곡에 공을 들이고 이 각자의 강한 색깔을 SM 기획 하에 하나의 테마로 엮어낸 이 앨범은, 음악 그 자체에서 다채로움 속 일관성, 일관성 속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가를 알아 왔기에 이 앨범은 나온 지 근 10년차인 지금까지도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걸 알게 된 지 1~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늘 댄스팝을 듣는 걸 좋아해 오긴 했지만, 강한 장르 음악을 즐기거나 궁금해 하기보다는, 철저히 멜로디와 가사, 혹은 아날로그한 편곡이 댄스 리듬에 묻는 감성 때문에 댄스곡을 즐겨 오곤 했다. 이 앨범이 나왔을 당시에는 특히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에 나에게 다소 난해한 앨범이었다. 이때의 나와 같은 취향이나 식견의 사람들은 아마 수록곡 중 '미행 (그림자: Shadow)', 'Goodbye Summer', 'Airplane'처럼 대중성과 소녀 감성이 가득한 곡들을 좋아했을 것이고(참고로 개인적으로는 굿바이썸머는 좋아한 적이 없음...) 실제로 가장 인기도 높은 곡들도 이 곡들이다. 당시의 나는 나머지 곡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위 3곡과 타이틀곡에 더하여 '시그널 (Signal)', 'Step'(역시 대중적인 감수성이 있는 곡들) 정도만 수록해서 6곡 정도만 구성된 미니앨범이었다면 정말로 알짜배기인 명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조금 더 노래를 듣는 귀를 갖추고 취향도 넓혀 본 뒤인 지금 다시 들어 보니 미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반드시 12곡 전체가 이루는 완성도가 곧 핑크테이프가 지니는 명반으로서의 가치고, 회자되는 이유라고 여겨진다.
1. ALBUM: 다채로움 속 일관성, 일관성 속 다채로움
이 앨범은 다채롭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테마를 이어나가는 동시에 음악적 변화를 주는 형태라서 더욱 음반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한 곡씩 보면, 먼저 타이틀인 '첫 사랑니 (Rum Pum Pum Pum)'는 걸그룹 팝에서 메인으로 잘 쓰이지 않는 악기와 효과음들이 특징적으로 귀에 들어온다. 이국적인 기타 소리와 시타르로 들리는 현악기, 북 소리, 발소리 같은 느낌의 퍼커션 등이 그것인데, 이 소리들은 신비로운 화성과 독특한 곡 구성과 함께 쓰이며 더욱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이런 곡 특징은 돌림노래 멜로디, 기묘한 가사와 합쳐지면서 주술적인 특색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재미 요소가 많은 곡인데, 특히 캐롤 '북 치는 소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 '럼펌펌펌'이란 가사와 멜로디도 그 중 하나다. 곡의 영제이자 캐치프레이즈인 이 부분은 원곡에서의 귀여우면서도 홀리한(?) 느낌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곡에서 리얼한 북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도 이 '북 치는 소년'의 영향 또는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듯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여러 요소들이 한 곡에서 적절하게 배치되며 이색적인 감상 경험을 만들고 있다.
'첫 사랑니'의 주술적인 특성은 다음 트랙들인 '미행 (그림자: Shadow)'과 'Pretty Girl'로도 이어지는 걸 볼 수 있다. 미행에서는 러블리하지만 신비하고 기이한 음악적 특징으로, 프리티걸에서는 가사의 마술적인 속성으로 그 연관성이 유지된다. 두 번째 트랙인 '미행'은 핑크테이프의 아트 필름에 쓰인 곡으로, 영상이 보여주는 비주얼과 같이 빛이 드나드는 듯한 투명한 벨소리들로 미스테리한 영롱함을 그려낸다. 순수한 멜로디 진행과 순수해서 더욱 기묘한 가사의 조합은 이 앨범의 유니크한 매력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미행'에서 'Pretty Girl'로 넘어갈 때는 낙차가 작은 간지러운 곡에서 낙차가 크고 무거운 곡을 던지는 식으로 전환된다. 기타 소리가 묵직한 듯 경쾌하게 들끓으며 호흡을 길게 끊어주는 'Pretty Girl'은, 그 다음으로는 칩튠 사운드 같은 것이 다닥다닥한 리듬으로 뛰노는 'Kick'으로 넘어간다. 이 곡이 진행되는 동안 멜로디는 꽤나 오래 2차원을 벗어나지 않고 직선적으로 달린다. 게임 사운드처럼 만든 브릿지(2:43)는 이상하면서도 묘하게 상큼해서 특히 맘에 드는 구간이다.
일렉트로닉하게 찌르는 'Kick'은 드라마틱함이 가미된 멜로디와 빈티지한 공간감이 웅웅대는 '시그널 (Signal)'로 넘어간다. 이 곡의 아날로그한 바이브는 그 다음 곡인 'Step'의 경쾌한 브라스 악기를 통해 이어지면서도, 자연스럽게 신나는 하우스 리듬의 곡으로 이동한다. 이 곡은 브라스를 리듬악기처럼 쓰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빠르게 달려 온 트랙들은 딱 중간인 7번 트랙에서 갑분어쿠스틱 + 남자 보컬 피쳐링 + 유닛곡으로 상당히 이질감이 드는 'Goodbye Summer (f(Amber+Luna+Krystal) (feat. D.O. of EXO-K))'를 맞이한다. 설명했듯 이 곡은 모든 면에서 앨범의 흐름과 결이 안 맞지만, 분명한 포지션은 있다. 'Goodbye Summer'는 트랙에서는 완전히 힘을 빼고 선선하게 쉬어가는 틈을 타서, 아련한 분위기로 첫사랑이라는 앨범 테마의 농도는 최대치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특히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섬세한 가사(는 솔직히 취향은 아니지만...) 때문에 '기억조작송'으로도 불리며 앨범의 시그니처로 가장 인기가 있는 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신없게 달리던 앨범은 이 곡을 기점으로 정확히 절반으로 끊어진 뒤 다시 출발한다.
이 예쁜 분위기는 잔잔한 소녀 감성을 일렉트로닉하게 그려낸 다음 곡 'Airplane'에서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원래 앨범의 흐름으로 돌아간다. 고조되는 EDM 사운드를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처럼 표현했는데, 이렇게 가사와 와닿도록 한 표현법이 감성에 맞닿으며 흥한 수록곡인 것 같다. 상공에 있는 듯 숨가쁜 드롭에 간결한 멜로디가 잘 묻으며, 브레이크와 잔잔한 부분의 조합도 좋다.
이 감성은 오래도록 젖어 있지 않고 'Toy'를 통해 다시 신나게 뛰어 오른다. 이 곡은 리듬이 빠르고 구성이 복잡하며, 특히 벌스의 독특한 박진감이 좋다. 후렴에서 멜로디와 섞여 나오는 챈트 같은 랩도 특징적이고 당당한 태도의 가사와 잘 어울린다. 가장 좋은 건 브릿지인데, 덥스텝 사운드에 스트링을 버무린 브레이크(2:04)가 매우 일렉트로닉하게 강렬하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웅장함이 느껴져 마음에 든다.
잔뜩 조져(?) 놓은 뒤에는 상큼한 보컬 코러스와 경쾌한 가벼움이 제대로 아이돌팝 느낌을 보여주는 '여우 같은 내 친구 (No More)'가 나온다. 가사는 구절구절마다 조금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예쁜 벨소리, 귀여운 멜로디와 함께 들으니 대충 퀸카로 살아남는 법 느낌도 나고... 아무튼 노래가 좋아서 가사의 장벽에도 불구 지나칠 수 없이 재밌게 듣곤 하는 곡이다.
다음 곡인 'Snapshot'은 전 곡의 팝 감성을 이어가면서 피날레 분위기를 조성한다. 피아노와 함께 고혹적인 뮤지컬 공연곡 같은 벌스가 나왔다가, 후렴에서는 내가 원래 알던 에프엑스처럼 강렬한 구간이 나온다. 또 이 강렬함을 풀어줄 때는 브라스가 나온다. 클래식한 세션이 많이 쓰였으면서도, 무겁고 리듬감 있는 마무리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에프엑스답다. 그러고 진짜 피날레 곡인 'Ending Page'에서는 감성적인 락을 가미해서 여운과 무게감을 함께 더해 준다.
앨범의 시작부터 끝까지, 쉬어 가는 7번 트랙을 제외하면 긴장감이 풀어지지 않는 흐름이 유지되지만, 그 안에서 정말 다양한 색깔의 일렉트로닉 팝이 개별로 빛나기도 하는 앨범이다. 그렇기에 [PINK TAPE]는 훌륭한 개별곡 12개의 단순 집합체가 아닌 하나의 음반으로서의 가치가 높이 평가될 만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에프엑스 멤버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아티스트의 소화력도 이 앨범의 완성도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이 앨범에서 에프엑스의 보컬이 좋았던 이유는, 화려한 실력이라기보다는 산뜻하게 정리된 미니멀함 때문이다. 곡에 영혼을 불어넣는 소울풀한 메인보컬 1명(루나), 보이쉬한 랩 톤으로 다른 팀에는 없는 특색을 더하는 래퍼 1명(엠버), 거리낌 없이 맑고 쿨한 음색, 직선적인 창법으로 기계적인 전자음악에 깔끔하게 잘 묻는 보컬 3명(크리스탈, 설리, 빅토리아)의 미니멀한 조화는, 곡들의 복잡한 구성 속에서 잘 정돈된 포지션을 보여주며 이 앨범이 추구하는 차가운 멋을 살린다. 이 앨범의 곡들처럼 강렬한 일렉트로닉 아이돌팝 곡으로 샤이니의 '히치하이킹 (Hitchhiking)'이 생각나는데, 에프엑스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성으로 보컬을 쓰고 있다는 점을 들어볼 수 있다. 샤이니 곡이 콘셉트는 댄디하면서도 보컬은 화려하고 야성적으로 사용한다면, 핑크테이프가 만들고자 한 캐릭터는 고양이처럼 시크하고 간결하다. 그리고 멤버들은 그 캐릭터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2. LYRICS: 잇걸 대신 힙스터가 부르는 에프엑스의 하이틴
참신하게 튀는 곡들이 많기 때문에 개별곡의 가사에 대한 긍정적인 평을 자주 접한 앨범이지만, 나는 그보다도 앨범의 전체적인 내러티브가 선명하게 그려져서 좋다. 일단 여름에 졸업식을 하는 미국(?)(아무튼 한국은 아님) 배경의 하이틴물이지만, 인물 설정은 최근에 유행한 예쁘고 위풍당당한 잇걸은 확실히 아니고, 더 퇴폐적이고 펑키한 태도의 힙스터 쪽이다. 유명한 곡인 타이틀곡 '첫 사랑니'와 '미행', 'Goodbye Summer' 등에서 이런 느낌을 잘 찾아볼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수록곡의 가사를 보면 이 앨범이 형성하고자 의도한 캐릭터가 이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닥 예쁘지 않다(!)는 설정에, 힐을 벗고 운동화를 신으며,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닌다. 남들과는 다른 나를 좋아하고, 난 나를 위해 산다며 당당히 말한다. 또 어느 가사에서는 내숭 떨지 말자고 하지만 다른 가사에선 본인도 티나게 내숭을 떨어 봤다 고백하기도 한다든지, 친구를 '여우 같은 기지배'라고 부른다든지 하는 가사 기조에서 나타나는 인물 성격들은 상당히 응집력이 있다. 이런 가사들을 보면 최근 걸그룹 가사 트렌드인 독립적이고 쿨한 Z세대 감성(다소 억지 감성이라 느껴지지만)과도 닮은 부분이 있다. 지금이야 질릴 대로 나와서 그다지 새롭지 않은 캐릭터이지만, 당시는 '청순 vs 섹시' 격돌이 걸그룹 신의 중심이던 2013년이었기에 흔치 않았고, 반항적인 성격도 지금보다 더 강한 어조로 느껴졌다. 물론 타이틀곡인 '첫 사랑니'에서는 이 캐릭터성을 느끼기는 힘들고, 수록곡을 위주로 그 의도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딱히 이러한 가사가 신선하다는 큰 반응이 일었던 것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냥 내 맘에 들었어서 강조해 본다.
예쁜 그녀는 몰라 깜찍한 앵두빛 입술부터 힙 다리 한껏 뽐을 내면 모든 일이 해결돼 참 편하지
너 같은 여잔 많아 왕자의 팔뚝에 의존해 꼭 매달린 Doll 넌 트로피 걸
창백한 얼굴만큼 아무런 색깔 없어 지루한 걸 -Pretty Girl
아스팔트 위 신기루 화이트 스니커즈로 Kick 체리빛으로 물든 Lips 꽉 문 민트 캔디
팬케이크처럼 Hot 뜨거워 작은 네 개의 휠 -Kick
네가 화장을 고쳐대는 그 때 운동화 끈을 고쳐 묶고 달려
조금 바빠도 난 이게 좋아 남보단 날 위해 사는 것 같아 -Step
하루 종일 예쁜 척 그건 너무 지겨워 Oh Oh Oh Oh Oh
너 없다고 눈물을 훌쩍 세상에 Never Never -Toy
위 곡들이 화자의 캐릭터를 묘사한다면, 연애담을 풀어 보여주는 곡들도 있다. 트랙이 넘어갈 때마다 반항적인 성격에서 급격히 감성적으로 변모하면서 다소 이중적인 인물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래서 더 영화 주인공 같은 입체성이 완성되고 있기도 하다. 사실 각 곡들의 가사가 하나의 이어지는 스토리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앨범에서 서정적인 색깔을 담당하는 이 노래들은 앨범 흐름에 서사적이고 로맨틱한 면도 부여하며 첫사랑이라는 모티브를 구현한다.
축제 마지막 날 너의 노래도 아른한 여름 바다도
함께라서 소중했던 맘 늦어가는 밤하늘처럼 안녕
친구라는 이름 어느새 미워진 이름
감추던 감정은 지금도 아픈 비밀의 기억일 뿐
혼잣말이라서 미안해 사실은 널 사랑해 -Goodbye Summer (f(Amber+Luna+Krystal) (Feat. D.O. Of EXO-K)
하늘을 나는 바람을 감는 구름을 걷는 그 비행은 끝이 났지만
오래된 인연 영원을 믿어 손을 잡은 오직 한 사람 -Airplane
넘 티나게 깜찍한 내숭 떨었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완벽해 보이고 싶은데
넌 꾸밈없는 나도 예쁘게 봐줄까 -Snapshot
네 바로 옆인데 시무룩해 노력해봐도 비슷해
네 표정을 볼 때 가장 설레었던 순수함을 찾아줘
의심의 함정 미움의 과정 혼란스러워도 지나가보면 아름다운 걸 네가 들려주길 -Ending Page
그리고 여기에 이와는 조금 다른 결의 수록곡 라인으로, '미행', '시그널' 등이 몽환적인 감성을 보여주며 앨범에서 순수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12곡 모두 따로 나뒹구는 곡 없이, 모든 가사가 대표곡이자 타이틀인 '첫 사랑니' 가사의 확신적인 자세를 납득시킨다.
마지막으로 그 '첫 사랑니' 가사는, 이 모든 곡들의 캐릭터성을 총집합한 자신만만한 태도를 주술적인 독특성으로 발전시킨다. 일반적으로 첫사랑을 소재로 한 노래라는 걸 상상하면,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며 그때 그 소년/소녀를 기억 속에서 되살려 보는 아련한 감성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 곡은 이러한 전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내가 너의 첫사랑이 될 거야'라는 내용의 가사는, 오히려 과거가 아닌 앞으로 올 미래, 만들어지지 않은 시간을 상정하면서 이야기한다.
특히 자기 자신을 사랑니에 비유한 가사 '다른 애들을 다 밀어내고 자리를 잡지', '삐딱하게 서서 널 괴롭히겠지', '힘들게 날 뽑아낸다고 한대도 평생 그 자릴 비워두겠지' 등은 첫사랑의 아픔을 노래하는 매우 참신한 표현이며, 주문을 거는 듯한 가사 '네 맘 벽을 뚫고 자라난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는 돌림노래 구간에 맞춰 신비하게 맴돈다는 점에서 곡과 완벽하게 합을 이룬다.
이렇듯 '첫 사랑니'의 가사는 신비한 곡조와 하나가 되며 예언 또는 주문의 효과를 시너지로 발산한다. 또한 앨범을 총체적으로 볼 때 이 곡은 더욱 입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된다. [PINK TAPE]가 힙하고 좋은 이유는 너무 많지만, 오래된 하이틴 영화 속 힙스터 여주인공 같은 이 노래 가사들은, 쿨하고 일렉트로닉한 곡들과 만나면서 에프엑스만의 개성적인 하이틴걸을 그려낸 중요한 요소로 빼놓을 수 없다.
3. VISUAL: 하늘 아래 핑테 같은 핑크색은 없다
사실 곡들은 걸그룹 노래치고 굉장히 매니악하다. 지금 들어도 대중적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앨범이 발매된 2013년 당시 K팝 기조를 상기해 보면 더 그렇다. 명곡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누가 불렀어도 무조건 성공했을 노래라고 단정은 못 짓겠다. 그런데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기획적 요소와 멤버들의 매력으로 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PINK TAPE]가 명작인 이유로 혁신적인 티저 영상인 아트 필름과 테니스 스커트 교복 의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위 2가지는 물론이고, 멤버들의 스타일 변신이나, 일명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안무 같은 것들을 기억에 남긴 이 앨범 활동의 '예쁜' 매력은, 사실상 대중에게 이 앨범 활동이 어필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다. 누가 봐도 독특하고 새롭고 매니악한 곡을 멤버들의 아우라와 비주얼 디렉팅으로 포장해서 이토록 회자되는 콘셉트를 만들었다는 점이 너무나 "아이돌" 그 자체 같아서 좋다.
사실 [피노키오]와 [Electric Shock]와 같이 에프엑스라는 팀의 음악적 특색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앨범은 더 많이 있다. 하지만 [PINK TAPE]의 대중적이고 명쾌한 콘셉트, 그리고 그 기획된 방향성 하에 잘 짜인 트랙리스트가 이들의 매니악한 색깔에 설득적인 매력을 더했고, 그런 점에서 드러난 차이는 곧 아이돌의 대중적 성공에서 개별곡 퀄리티의 외적인 기획력의 중요성을 재확인시킨다.
이 비주얼 어필에서 가장 강렬하게 작용한 점은 무엇보다 아트 필름 영상물일 것이다. 이 콘텐츠에 대해서는 일전에 다른 글로 언급한 적이 있어서, 해당 포스팅에서 이 핑크테이프 아트 필름 부분만 가져와 인용한다.
📎 f(x) 에프엑스 "Pink Tape" The 2nd Album Art Film (2013)
K팝 산업을 관심 있게 지켜본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 영상은, 티저계의 새로운 바람이었다. 언뜻 일반적인 티저 영상 같지만, 사실은 타이틀곡인 '첫 사랑니'의 실제 뮤직비디오 콘셉트와는 전혀 관련이 없이, 새로운 앨범의 시각적 분위기와 메시지를 독특하게 함축해 전하는 목적으로만 제작되었다. 지금은 많은 아이돌의 콘텐츠에서 이런 식으로 시각적 효과와 오브제들을 나열하여 '콘셉트 필름', '콘셉트 티저' 등으로 부르는 이미지 영상물이 등장하는데, 이 핑크테이프 아트 필름이 그 흐름을 일으킨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상은 '아트 필름'으로 명명된 것이 무색하지 않게 심미적인 시각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주로 빔프로젝터를 활용해 형형색색의 투명한 빛을 표현했으며, 자연광 아래의 멤버들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한다. 후반부에 다채로운 색감을 톤다운된 필름 노이즈로 누른 듯한 화면은, 최근 트렌드였던 레트로 하이틴 영화 분위기도 떠올리게 한다. 반짝거리면서도 퇴폐적인 이 시각적 느낌은, 몽환적이고 사랑스러운 배경 음악인 에프엑스의 '미행 (그림자: Shadow)'과 만나며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초반 크리스탈의 영어 내레이션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며 타이틀곡 '첫 사랑니'의 배경을 '사랑'의 키워드로 확장한다. 영상 속 인물들은 아이처럼 웃고 즐거워하지만 종이를 입에 넣어 씹는 등 해석을 요하는 기이한 행동들을 하는데, 이 때문에 영상은 단순히 예쁜 화보물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앨범이 가진 내재적 의미와 독특성을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숨 막힐 정도로 농도 짙은 키치한 감성은, 현재는 많은 이들이 열광하여 비주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K팝 신에서 '민희진(당시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트 디렉터로, 해당 영상물의 디렉터) 감성'이라는 고유 개념으로 정립될 정도로 매우 신선했고 마니아를 형성하기 충분했다. 디렉터 민희진의 의도처럼 웰메이드 앨범을 서포트해서 '로맨틱한 에프엑스'를 그려낼 수 있었던 이 콘텐츠는, 음악만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감각적 지점을 비디오를 통해 200% 충족시켰다.
여기에 아래 사진과 같이 핑크색의 VHS 형태로 만든 앨범 패키지 디자인도 매우 특색 있다. 실제 비디오 테이프 같은 외부 디테일과 화면 영사기 모양으로 만든 CD, 멤버들을 8비트 캐릭터로 그린 포토카드 등은 '소장템'으로서의 가치를 높여 주고, 앨범의 음악적 테마와도 결을 함께 하고 있다. 이렇게 세세한 기획물들까지 모티브가 일체화된 핑크테이프는, 앨범 그 자체로 추억의 매개체 같은 느낌을 주며 첫사랑을 표현한 듯한 감각적이고 엔틱한 아이템이다.
또 첫사랑의 풋풋함을 상징하여 교복 스타일을 의상에 응용했다는 점도 이와 같은 일환의 아이디어인 듯하다. 특히 동남아 학교의 교복 스타일에서 차용했다는 테니스 스커트는 한 세대에 열풍한 유행이 되었을 정도로 성공한 대중적 요소다. 음악 자체에서 다소 어렵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이렇게 예쁘고 손 가는 디테일들이 보완하면서, 완성도 높은 대중문화로서의 가치가 배가되고, 더 나아가 접근성 낮은 장르 음악을 대중화하는 기획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촬영물에서는 피사체가, 의상에서는 옷을 입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듯이, 아무리 영상, 앨범, 의상이 잘 준비되었더라도, 이 모든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는 그것을 소화하는 아티스트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기획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그 누가 소화했어도 똑같이 레전드가 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이유는, 에프엑스 멤버들의 쿨하고 건조(?)한 비주얼이 이 시각적 어필의 상당 부분을 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청순한 메이크업과 의상에서도 힙하게 빛나는 크리스탈과 설리를 보면, 아이돌에게는 단순히 예쁘다는 것을 넘어, 타고나는 영역의 '워너비스러운' 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퀄리티 높은 음악은 또 나올 수 있겠지만, 이런 레전드 앨범 활동은 다시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주얼 디렉터들도 멤버들의 비주얼에서 영감을 받는단 말이다... 결론은, 멤버들의 독보적인 매력과 소화력 역시, 이 앨범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 결정적 요소 중 하나로 절대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에 12곡의 볼륨으로 이런 퀄리티의 앨범이 나왔다는 것은 상징적인 시대 변화다. 힙하고 차가운 음악에, 로맨틱한 스토리와 비주얼 요소 등이 매니악한 이 앨범으로부터 대중성을 완벽하게 극대화하고, 매력과 소화력을 지닌 아티스트를 만나면서 즐길 거리가 너무나 다양한 명작품이 됐다. 이 모든 요소에서 중요한 건, 이 앨범의 방향성이 너무나 참신하다는 것이다.
리뷰 글 제목에 '첫사랑 아이콘'이란 표현을 썼고, 첫사랑을 소재로 한 K팝의 대표곡으로 '첫 사랑니'를 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 노래의 화자는 어느 시대를 타고났든 국민 첫사랑은 될 수 없었다. 유튜브 댓글에서 이 노래를 두고 '한국 하이틴', 'SM의 정체성'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반응이 많지만, 마찬가지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사랑을 다루는 그 어떤 콘텐츠보다도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이 노래와 앨범은 다른 무언가의 전형이 되거나 대표성을 띨 수 없다(물론 내 동년배들 추억의 기폭제라는 건 인정한다. 한국 하이틴이라는 말은 이러한 접근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특별한 것이고, 이토록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느 때에 이 앨범이 나왔더라도 새롭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에프엑스란 함수 자체가 특이하고 매니악한데, 여기에 대중적 소재인 첫사랑을 대입해 출력한 핑크테이프란 결과물은 당연히 이색적일 수밖에 없다. 기묘한 이 핑크색의 사랑은 마냥 사랑스럽다기보단 낯설다. 첫사랑치곤 버겁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린 그래서 이 앨범을 좋아한다. 언젠가는 이 독특성이 익숙하고 레트로하게 느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온 지 10년차인 지금까지는 그게 언제쯤이 될지 잘 모르겠기는 하다. 그리고 그렇게 느껴질 때쯤에, 2013년에 나온 이 앨범이 K팝에서 역대급의 명작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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