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의 소리가 부르는 사이버 던전 - 에스파 미니1집 앨범 [Savage] 리뷰

2021. 10. 10. 17:49k-pop review & essay

 

 

 

에스파에 대한 글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일단 낯선 신곡이라 더 좋게 들리는 버프 효과가 사그라들기 전 상태에서 리뷰를 써본 적이 없고, 또 이렇게 시리즈 형태의 컨셉추얼한 노래를 하는 팀에 관해서는 특히, 단일곡 단위보다는 여러 개를 보고 난 뒤에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여러 방면에서 이 앨범이 에스파의 행보에서 상징성이 있을 지점이라고 판단했기에 리뷰를 써보려 한다. 전 글은 에스파 자체에 대한 소개와 설명 위주였다면, 조금 더 솔직한 감상은 이번 글에서 나타날 듯하다. 

 

들어가기 전, [Savage]가 리뷰로 남겨 놓고 싶을 만큼 좋다고 받아들이게 된 데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했다. 

 

 

 

0. 세계관에 여전히 흥미가 안 간다.

에스파의 세계관이 대중에게는 밈 그 이상과 이하로도 몰입하기 어렵다는 점은 앞으로도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흥미를 유발하는 구조도 아니다. 그리고 그건 대중성을 따라가야 하는 시장에서 초현실 사이버펑크의 꿈을 꾼 이상, SM이 방법을 잘못 설계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다. 오히려 이 정도로 마이너한 콘셉트의 붐을 꾀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는, 할 수 있는 방법 내에서 이렇게 최상의 퀄리티를 제공하는 건 우리나라 기획사 가운데 SM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세계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지라도 노래가 먹혔으니 솔직히 더할 나위 없다. SM이 꿈꾸는 세상은 좀 더 먼 미래를 기약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도 도전적인 시도로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행보다. 

 

 

… 근데 그건 그거고, 아무튼 직관적으로 감상했을 때는 항마력이 필요해지는 기획이다. SNS상의 내 정보가 축적돼 내 분신이 되었다는 설정부터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런 기획 면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노래를 부르는 에스파 멤버들부터가 항마력 부족한 티를 숨기지 않는데(물론 무대에서는 잘함) 이것이 대체 뭘 위한 것인가 싶다. 물론, 단순히 '저게 뭐야!' 싶은 괴기스러운 시도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난해함을 뛰어넘는 미래관 같은 게 있다는 건 알겠다. 근데 그게 재미가 있어야 해석해내는 데 에너지를 들이게 되는데, 그건 아니란 거다. 

 

 

 


1. 하지만 에스파의 음악이 구축하는 사이버 던전은 매력적이다.

에스파에 대한 느낌은 위 같은 면으로 인해 늘 양가적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쪽으로 중심추를 잡아주는 생각은 곡에서 나온다. 첫째는 잘 만들어졌다는 점이고(수록곡 전체를 볼 때), 둘째는 그 잘 만들어진 음악이 에스파의 개념적인 세계와 너무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콘셉트만 앞서나가고 실행이 못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음악 중 어느 것이 선행되었을지 구분하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물론 전자겠지만) 음악 퀄리티가 기획의 독특성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이버 던전'이라고 표현했듯 에스파의 음악 세계는 전자 악기가 전하는 매력으로 가득하다. 게임 속에 들어온 것처럼 차갑고 뾰족하게 왜곡된 소리들은 인간미는 느껴지지 않지만, AI 친구와 빌런을 찾는 모험의 여러 장면들을 생생히 전달하는 배경음악으로서는 매우 적절하다. 대중음악이기에 보컬과 멜로디가 우선시되는 건 당연하지만, 이 앨범에서는 유독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서포트 역할만 하지 않고 전면으로 강하게 튀어나와 보컬과 싸우면서 시퍼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때맞춰서 그 가사 내용은 미래적 SF 같은 설정을 기반으로 싸움을 벌이는데, 곡이랑 안 어울릴 수가 없다. 음악도 이상하고 가사도 이상하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어쨌든 그 둘끼리는 상당히 온도가 잘 맞는다. 약간 오버스러운 가사들이라도 대부분은 저세상 감성의 음악 속에 어느 정도는 녹아 들어갔다. 외부와 벽을 치고 자기 세계를 잔뜩 쌓아 올린 채 가상의 적과 전투하는 이 사이버 던전은 누가 봐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잘 만들어진 독자적인 에스파의 공간이다. 항마력 부족으로 달아난 이들 중 몇몇은 이런 식으로 노래로서 설득해 되찾았다(난 수록곡이 좋아서 되돌아옴ㅎ). 

 

 

이러한 목적으로 작정한 타이틀은 물론이고, 밝거나 감성적인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수록곡에서도 이런 음악 색깔이 힘이 빠지지 않고 달린다. 강한 걸크러쉬를 표방하는 여느 걸그룹이라도 이렇게 앨범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밀도는 부담스럽다. 어려워서 안 하는 것도 있겠지만, 웬만해서는 팬들도 그정도까지 바라지를 않기에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세간의 반응은 죄다 무시하고 제 갈 길 간 SM이 있었기에 들을 수 있었던 생소한 색인 것이고, 반대로 보면 단순히 생소함이 아닌 퀄리티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부정적 반응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귀가 좀 아프긴 한데 전자 사운드의 함량이 높다는 점이 개성으로 느껴져서 좋다. 물론 케이팝을 벗어난 장르음악에야 비교할 수 없겠지만(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 일단 걸그룹 한정해서는 '일렉트로닉한 음악'의 표준을 올려놓는 앨범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쉬운 점은, 가장 기대하게 했던 'Savage SYNK DIVE Clip' 티저에 나오는 강렬한 음악들이 앨범에 실리는 곡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에스파 멤버들의 목소리와 그렇게 잘 어울리는 트랙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안 나오니 아쉽게 느껴지는... 어쨌든 이런 노래를 내는 걸그룹은 없으니까... 해당 음악은 아래의 각 이모티콘을 클릭하면 감상해볼 수 있다. 이모티콘은 각 멤버의 엠블럼이라고 한다. 

[ 🖤 🦋 🌙  ]

 

 

 


2. 인간미 없는 음악 기조를 목소리로 빛내는 두 멤버가 있다.

하지만 사실 음악이 세지고 일렉트로닉해질수록 대중음악으로서는 편하지 않고 어렵다. 아이돌 노래라면 여기서 음색이나 감정 표현 등 목소리로만 할 수 있는 퍼포먼싱이 이를 멋지게 소화하는 방식일 것이고, 에스파도 매력적인 가창자를 둠으로써 음악을 완성했다. 

 

소제목이 가리키는 멤버는 윈터와 닝닝이고, 리뷰 제목에서는 세이렌이라고 표현했다. 혼란하고 파괴적인 소리들의 틈을 뚫고 나오는 두 사람의 보컬이 마치 세이렌 같다. 물론 에스파의 노래에서 둘의 보컬은, 홀려서 따라가면 죽음을 맞는다는 신비로운 요정의 목소리라기엔... 누가 봐도 따라가면 안 될 것 같은 죽음의 땅에서 들려오는 전사의 노래라서 비유가 큰 공감을 사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수록곡까지 전부 들어본 뒤에는 어떤 부분에서 이 같은 표현을 하게 되었는지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헤드기어가 예뻐서 4명 다 가져왔는데, 가운데 2명이 윈터와 닝닝이다.

 

차갑고 강한 에스파의 노래 가운데서 서정적 감성과 공간감을 부여하는 건 윈터와 닝닝이다. 물론 이 둘이 기량을 뽐낼 수 있는 포커스 구간이 따로 마련되는 곡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곡이라도 이들의 목소리만으로 그 존재감을 들어볼 수 있다. 

 

두 사람이 실제로 스킬이 능한 것과는 별개로, 이것이 단순 멤버 간 실력차에서의 우위를 말하는 건 아니다. 4인의 멤버는 음색 톤 높이가 비슷하여 유별나게 튀는 사람이 없지만, 이들이 노래로 만들어지는 디렉팅에서는 캐릭터 차이가 생긴다. 카리나와 지젤의 목소리는 에스파 음악의 기계적 느낌을 공고히 돕는 역할로 직선적인 소리를 뽑는다면, 윈터와 닝닝은 유려한 질감으로 폭발적이거나 깊이 있는 표현을 한다. 

 

만약 이들의 소화력이 없었다면 에스파의 노래는 훨씬 냉소적이고 어려웠을 것이다. 윈터는 예리하고 닝닝은 양감이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둘은 그 차이를 기반으로 에스파 보컬의 가장 안팎의 위치를 지키며 드라마틱한 입체감을 발산한다. 이렇듯 에스파의 노래가 매력적으로 들리게 하는 데는 두 보컬의 역할이 크다. 그리고 이들은 이번 앨범에서 처음으로 수록곡이란 걸 선보였기에 더욱 다방면으로 돋보일 수 있었다. 굳이 두 사람 얘기를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내가 수록곡들에 이끌려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3. 에스파의 세계는 애초부터 혼돈하고, 그래서 난해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에스파는 왜 꼭 어렵게 만들어져야만 했을까? 

 

[Savage - The 1st Mini Album]는 앨범 소개부터 에스파를 '메타버스 걸그룹'으로 칭하고 있으며, 세계관에 대한 자부심도 드러낸다. 이 콘셉트가 정말 지독한 게, 음악은 쨍하고 뮤직비디오는 현란하고 가사는 부자연스럽도록 그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고 모든 방면에서 일관성이 지켜지고 있다. 이미 그들은 가상의 분신이 있고, 그와의 관계를 방해하는 가상의 빌런을 설정했고, 그를 아량 없이 처단해서 내 분신을 되찾는 데 몰입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도운 가상의 구원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근데 이건 진짜 좀... 가사가 몰입을 너무 깼다)

 

근데 솔직히... 이 세계관이 아직까지는 제작자한테나 의미가 있지, 듣는 사람한테는 별 의미 없다. 단지 에스파나 에스파의 음악에 끌린 사람들이 그걸 이해해보려고 노력해 볼 뿐이다. 

 

 

하지만 에스파 혹은 에스파의 음악 어느 부분에 이끌렸으면서도 그 관종스러운 기획력에는 비난을 하고 싶어진다면, 이 사실도 알아야 한다. 위 모든 이상한 세계는 에스파와 에스파 음악의 존재에 선행한다. ae와 블랙맘바를 두고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성은 일반적인 세계가 돌아가는 방향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 자신으로 온전하기에 타협할 필요가 없다. 온전하다는 것은, 에스파의 여러 실험적인 요소들이 각각의 단순 '어그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응집된 하나로서 서로를 완성하도록 연출됐다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데서 알 수 있다. 1. 한 곡 안에서도 몇 번이고 장르가 바뀌고 세션이 갈아치워지는 난해함은 에스파 세계관 속 분리된 세계들을 넘나들어야 하는 스토리와 일치한다. 2. 사이버 친구를 찾는 여정의 난해한 가사는 사이버틱한 멜로디 위에 입혀지고 있기에 이질감이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 3. EP를 내도 거의 전곡에 이 같은 음악 세계가 일관되고 있다. 이렇듯 난해함이 그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든 것이 애초부터 일체화된 기획물인 것이다. 이 기이한 콘셉트에 노래 퀄리티가 따라와 주니 갑자기 영화나 게임 OST 앨범처럼 느껴지면서 더 신나고 재밌는 앨범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에스파 세계관 기획이 자신들의 그사세(?)에 함께하자고 끌어들이는 방식인 것이다. 

 

데뷔 전에는 대중 모두가 거부감을 표했고, 노래를 냈을 때는 노래만 좋다고 했으나, 세번째 앨범쯤 나오니 사람들이 저항감을 잃어가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과하지 않나 싶었지만 지금 보니 모두가 듣고 있으니까 뭐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음악마저 세련되게 만들어내는데, 취향에는 안 맞는 게 있을지라도 더 이상 뭐 때문에 별로였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초반 반응이 조금 좋지 못하더라도 뚝심 있게 밀어붙일 수 있는 자본력으로 꿈을 펼치는 SM의 퓨처리스트들이 참 부럽다. 

 

 

 

그리고 어플로 스캔을 하면 세계관 속 P.O.S가 열리는 증강현실을 제공한다는 이 앨범 엄청 신기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과몰입 아니고 그들의 세상이 있는 걸로 인정하자

 

 

 

 

 


 

 

 

아무튼 그래서 앨범 리뷰 시작!

 

Album [Savage - The 1st Mini Album] 리뷰: 세이렌의 소리가 부르는 사이버 던전

 

[EP] Savage - The 1st Mini Album (2021. 10)

01 aenergy [★]
02 Savage
03 I'll Make You Cry [★]

04 YEPPI YEPPI [★★]

05 ICONIC [★★]
05 자각몽 (Lucid Dream) [★]

 

*앨범 리뷰의 별점은 [ ], [★], [★★] 3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01 aenergy [★]

카리나 "Rocket Puncher", 윈터 "Armamenter", 지젤 "got Xenoglossy", 닝닝 "E.d Hacker"
Villains all go down 내가 거칠고 사나워졌다고 해도 My ae를 지킬거야 Yeah

 

따로 찾아서 듣기보다 이 앨범의 흐름 속에서 들을 때 확실한 의미를 갖는 곡이다. 드럼·베이스와 함께 멤버들의 보컬이 대포처럼 두텁게 쏘아지며 블랙맘바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1번 트랙이라는 위치와 2분대의 러닝타임, 변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간결한 구성, 두들기는 듯 강력한 후렴구 멜로디의 반복이 앨범의 인트로곡 역할을 충실히 하며 광야행 급행열차로 탑승시킨다. 특히 공격적인 후렴구 멜로디로 인해 수록곡 중 보컬 유니즌 단독의 존재감이 가장 강한 곡이다. 

 

무엇보다 이 곡이 인상적인 이유로 'energy'를 세계관 패치해 'aenergy'로 바꾼 제목의 과몰입력부터, 위 같은 강한 곡 특성까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또 가사의 존재감을 부정할 수 없다. 2절 가사에서는 전대물 인트로 OST처럼 멤버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인간병기, 무기능력자, 언어능력자, 해커라는 오타쿠스러운 전투 스킬을 소개해준다. 여기서 약간의 항마력만 갖춘다면 구성의 단조로움이 느껴질 새도 없이 박진감이 차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물론 항마력이고 뭐고 이미 뷰티풀걸스와 샤이니월드를 떠올려버렸다면 박진감은 찾아볼 수 없게 되겠지만... 

 


02 Savage

그것 봐 난 좀 Savage, 너의 재생력을 막아 흐트러놔 빼놔
잊지 말아 여긴 바로 광야, 너의 시공간은 내 뜻대로 Make It break it

 

이젠 에스파가 이렇게 안 하면 싱겁겠다 싶을 정도로 놀랍지 않은 변화무쌍함이다. 도입은 따가운 톤의 전투적 랩과 독특한 금속음으로 이루어졌다가, 프리코러스는 퓨처리스틱하고 소울 가득한 보컬 파트로, 또 후렴구는 미니멀한 멜로디의 힙합으로 바뀐다. 'Next Level'과 같이 가뭄에 단비 같은 보컬 파트가 중간중간 나올 뿐 랩 함량이 여전히 높고, 랩과 보컬 모두 전작보다 과격하고 감정이 고조돼 있어 한 단계 더 나아간 세계관의 스토리를 연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구조는 처음에는 낯설었어도, 보다 보면 유사한 보컬톤으로 포지션을 넘나드는 4명의 멤버 구성으로 음악적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좋은 방법 같기는 하다. 종잡을 수 없는 구성이 큰 특징이지만 솔직히 전작이 전작인지라 그보다 충격적인 구성은 결코 아니다. 

 

다만 리뷰 전반부에서 이 곡이 의미적으로 좋은 점을 전부 설명했고, 남은 건 아쉬운 소리뿐인 듯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타이틀곡만 대중적 접근성이 더 좋았다면(물론 음원 성적은 이미 너무 좋지만... 그거랑은 다르죠?) 역대급 앨범이 되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아쉬움이다. 이 내용은 ▼더보기에서 확인해 주면 좋겠다. 

더보기

우선 이 곡이 잘 뜯어 봤을 때 사운드적으로 멋지게 만든 노래이기는 하나, 그 이상으로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던져 주지는 않는 듯하다. 사운드와 보컬 파트는 매력적이지만 그 외 모든 것인 랩과 가사로부터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는 혼란스럽다. 전작에도 랩이 많지만 그 곡과는 사정이 다르다. 절도 있는 리듬꼴에 랩을 캐치한 춤과 함께 딱딱 꽂아 넣은 'Next Level'과 다르게 이 곡에서는 진짜 힙합스러운 자유분방함이 랩 파트를 뒤덮는다. 하지만 멤버들의 랩 소화력은 사실 엄청나게 훌륭하다고 느껴지지는 않고 오히려  랩이 주력인 멤버보다 2절에 나오는 보컬 멤버 윈터의 랩이 가장 잘 감긴다. 곡에 충분히 들어갈 법한 랩이지만, 후렴구와 이어지며 길이가 지루해지고 또 모든 멤버의 톤이 높기도 해서 곡 중 지분이 너무 크게 느껴지지 않나 싶다. 

 

타이틀곡이기 때문에 아쉬운 점을 하나 더 말하자면, 킬링 포인트로 배치된 'Get me get me now Get me get me now (Zu Zu Zu Zu)'가 전작의 히트의 주역이었던 'I'm on the next level' 파트의 존재감을 대체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오히려 수록곡들은 이 곡처럼 구성은 복잡하더라도 확 꽂히는 좋은 포인트는 저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정작 타이틀이 가장 난잡하면서 포인트는 가장 처지게 느껴지는 것이 아쉽다. 대중성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파트로 인해 딱히 작품성이 가미됐거나 사운드가 부각된 것도 아니지 않나...? 오히려 개인적으로 그 파트는 너무 단조롭기에 잠깐 쉬었다 가는 프리코러스일 것이고 그 뒤에 좀 더 보컬이 드러나는 진짜 후렴구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딱 그 지점이 최고점임이 느껴지니 더 맥이 빠지기도 했다. 

 

랩 분량 조절과 훅 포인트 둘 중 한 가지만 챙겼더라면 이렇게 아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튼 이 한방만 빼면(절대 뺄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잘 깎아 만든 멋진 노래다. 특히 계속 말하고 있는 보컬 멤버들의 표현력과 스펙트럼이 인상깊고, 브릿지 뒤에 나오는 덥스텝스러운 브레이크가 특히 좋다. 

 

 


03 I'll Make You Cry [★]

떠돌고 있어 넌 야 타락해버렸지 칼을 빼 들어 난 칼을 빼 들었지
누가 널 구해 아무도 못 구한대 쫓겨난 너를 보면서 웃지

 

칩튠 사운드와 공격적인 보컬이 강조되는 파괴적인 분위기의 곡이다. 멈추지 않고 돌아다니는 게임 사운드에 귀가 얼얼하긴 하지만 그 점이 곡의 매력 포인트다. 공격적인 가사도 그렇고, 곡 자체도 고저차가 별로 없이 강-강-강-강으로 때리며 타이틀의 무드를 잘 이어가는 노래다. 센 노래긴 하지만 소리들을 빽빽하게 밀어넣었다기보단 전자음 가닥가닥을 재미 요소로 잘 엮어 놓았다는 느낌이다. 

 

또 강한 구간들 사이에서 음색이 돋보이는 인트로와 브릿지가 잔잔하게 빛난다. 인트로에서 사운드는 정신없이 째지는 동안 보컬은 나지막하게 랩인지 내레이션인지 보컬인지 모를 목소리를 내뱉고, 묵직한 도입에 들어가기 전 멤버들의 맑은 화음 포인트가 마무리하는 게 좋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브릿지는 내내 곡을 꽉 채운 신스 사운드 대신 단단한 보컬 솔로가 주가 된다. 특히 4명 모두가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맡는 데서 기계적이지 않게 감정을 전달하는 각 멤버의 표현을 느낄 수가 있다. 

 

 


04 YEPPI YEPPI [★★]

내가 바로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예쁜 애야 사람들의 수군거림 그런 건 Nothing이야
월화수목금토일 난 너무나 예뻐서 바빠 Oops! 내가 걸어갈 이 길 위는 다 AURORA 빛

 

아까는 새비지라다가 갑자기 예삐라니... 에스파의 원래 플롯도 설명이 별로 없는데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를, 그것도 요즘 가장 흔하게 하는 Z세대 소울 그 자체인 얘기를 꼭 하고 넘어갔어야만 했을까? 조금 아쉽다가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래야만 했다. 1. 노래가 너무 좋다 2. 이럴 때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바이브다. 

 

다크하게 달리던 앨범을 환기할 적절한 타이밍에 멤버들의 발랄하고 색다른 톤을 들려주는 선물 같은 곡인 듯하다. 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곡이라고 하는데, 이유를 알 것만 같은 개성적이고 대중적인(?) 멜로디의 노래다(에스파 자체가 워낙 특이해서 대중적인 곡이어야 앨범 내에서는 특색 있는 곡이라는 게 아이러니). 

 

물론 에스파니까 결코 대중적인 부분을 순순히 들려주지는 않는다. 이 곡은 당당하고 자신감있는 메시지의 테마를 기반으로 여러 가지 힙한 장르들을 전환하며 복잡한 구성을 쏟아내다가, 이 번쩍번쩍한 벌스와 프리코러스들을 상큼한 후렴구 멜로디가 귀를 확 잡아끌며 정리해버린다. 이 후렴구의 즐거운 멜로디는 인트로만 들었을 때는 예상할 수 없는 지점이다. 테크노한 딥하우스로 시작한 뒤 랩과 멜로디랩 같은 것들이 엉킨 빌드업 끝에 멜로딕하게 풀어낸 후렴은, 에스파로부터 들어본 적 없던 긍정적인 상승 에너지를 발산한다. 또 후렴에 들어가기 전에 '에스파!'를 외치는데 그 이름이 이렇게 화사하게 들린 것도 처음인 것 같다. 

 

구성이 다채로운 만큼 멤버들의 가창 방식도 다양하게 드러난다. 음역 폭이 큰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다양한 랩을 들어볼 수도 있으며, 다른 곡에는 없는 쨍한 보컬톤도 매력적이다. 

 

 

 

05 ICONIC [★★]

저 별빛이 배인 선명한 목소린 내 꿈 안에 꺼지지 않을 Flames
뭘 그리 고민해 네 심장은 내게만 반응해 지루한 Frame 보란 듯 벗어 나
네 맘 다 사로잡았어 이미 난 I-C-O-N-I-C

 

수록곡은 다 양질이어서 취향에 따라 베스트곡이 갈리는 듯하지만, 나는 이 노래가 가장 좋다. 메시지는 'YEPPI YEPPI'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2인칭을 설정해서 청자와의 연결적 관계를 조금 더 강조하는, 몽글몽글하면서도 당차고 강한 곡이다. 에스파의 곡을 설명할 때 계속 이렇게 모순이 충돌되는 묘사를 하게 되는데, 이 곡 역시 반전이 여러 번 등장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장 좋은 부분은 보컬 멤버들의 음색이 황홀하게 녹아드는 파트들로, 리뷰 제목에 세이렌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먼저 귀가 확 꽂히는 달콤한 프리코러스는 무거운 비트에 앙칼진 랩 도입 뒤로 대비되며 더욱 집중된다. 가사처럼 별빛이 배인 듯한 가성 멜로디는 윈터와 닝닝의 청초한 톤이 입혀지며 홀리는 듯 '네 맘 다 사로잡았어 이미 난'이란 노랫말을 부른다. 그렇게 홀려 간 뒷부분에서는 묵직하게 중첩되며 찍어대는 화음과 어둑한 저음의 하모니가 기다리는데, 이토록 입체적으로 배치된 보컬의 환상적인 온도차가 너무 매력적인 노래다. 힙한 후렴구에서 다시 아름다운 브릿지로 넘어갈 때의 전율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06 자각몽 (Lucid Dream) [★]

무언갈 그리워한 느낌, 의식과 꿈의 경곌 헤맨 것 같아
자욱한 안갯속에 너무도 달콤하게
방향도 모르는 채 끝없이 거니는 꿈

 

앨범의 차가운 무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여운이 남게 마무리짓는 완벽한 방식의 곡이다. 비트는 힙합에 신스들은 꿈처럼  아득하며, 앞선 곡들보다 미니멀하지만 그 비워진 공간에는 보컬찹 같은 디테일이 부각되며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이런 R&B 팝 스타일의 미디엄 템포 곡은 색다른 건 아니지만, 이 곡이 좋은 이유는 첫째로 편곡이 뻔하지 않게 비틀렸고, 둘째로 에스파의 차가운 듯 감성적인 음색과의 조화가 시리게 좋다는 데에 있다. 

 

여러 청각 장치들과 왜곡된 신스 사운드, 쌓인 보컬 화음은 앞 트랙들에서 강력한 악기들이 빠져나간 공간감을 은은하게 꽉 채운다. 또한 찌르고 쏘는 고음역의 곡이 많은 이 앨범에서 멤버들이 안정적인 음역의 음색을 보여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이렇게 무의식 상태를 편곡과 가창으로 표현한 방법은 앨범 아트에서 나타나는 공간과 같은 차갑고 쓸쓸한 현장감, 또 대상을 그리워하는 정서 속에 청자를 가두는 듯하다. 

 

 

 

 

 


싱글만 3연속 발매했던 에스파의, 그리고 전작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에스파의 음악적 색깔을 선포하는 상징적인 첫 EP 앨범이었다. 이전 글에서 'Next Level'이 가져온 기대이자 우려를 에스파의 오리지널리티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궁금증을 표했었는데, 이 앨범은 그에 답하는 좋은 신보다.  [Savage - The 1st Mini Album]는 기대보다 좋고, 우려보다 강하다. 타이틀은 아쉬웠지만 사운드적으로 에너지가 밀리는 곡이 없으면서도 여러 가지 매력과 유기적인 흐름을 보여준다는 구색을 잘 갖춘 앨범이다. 

 

 

여담이지만

 

SM은 언제 이 이야기를 완결낼 계획일까? '환각', '부수겠다' 같은 단어 표현들과 피곤한 정서의 반복이 지루해질 타이밍이라, 빠른 시일 내에 블랙맘바를 없애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겠다. 가상세계 시장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아마 얘기할 거리는 많을 것 같다. 지금의 에스파의 세계를 두고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이야기하는 언젠가의 모습이 벌써 눈앞에 선명하다. '그땐 진짜 이상했는데 돌아서 보니 SM이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라고 예찬하는 모습이... 근데 이걸 미래를 보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재가 얼마나 진보적인지를 자랑하기 위해서는 당대에서 얼마나 와닿게 표현하는지도 중요한 과제다. 미래 세계를 이야기하는 SM의 기획이 음악과 비주얼을 다루는 소재에서 그칠지, 그 이상의 메시지가 있을지는 앞으로 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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