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29. 23:23ㆍk-pop review & essay
<이전 글> 우주소녀에 관한 소회 (1/2): 소장 욕구와 여돌 덕질의 상관관계 ['비밀이야' 분석 리뷰]
✔ 글이 좀 길어요...
언젠가부터 음악 취향이 대중적이고 산뜻한 쪽으로 개조되고 나니까
내가 좋아했던 것들 중 그렇지 않은 것으로 끝판왕인 이 앨범들 얘기를 하려니
글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가슴이 턱턱 막힌다. (ㅋㅋ)
하지만 이 똑같은 느낌이 한때는 벅차오름이었다.
그 벅차오름이란 이런 거다.
먼저 시청각적으로 매우 풍부하면서 왠지 서사에 슬픔을 품은 듯해 감성을 자극하는 콘텐츠,
그 디테일들 중 내 맘에 드는 것들을 발견하며 나의 취향에 가깝도록 해석해 나가는 몰입의 단계,
거기에 내게 중요한 기억과 의미들이 채워지며 더욱 개인적으로 애틋해지는 내면화의 과정,
그리고 그것이 동반하는 나만의 세계의 폐쇄성과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 모두에게 알려지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론 내가 구축한 세계가
그로부터 뒤따라올 수 있는 균열은 없이 온전히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욕심까지,
마이너를 사랑하는 일은 때때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이 마냥 명쾌하고 직관적인 행복만 즐기게는 할 수 없는 수많은 속성을 동반하지만
또한 그 사실을 즐기는 것이 거기에 스스로 참여하는 이들이 가진 본연의 속성이고
씹덕질의 본질이다.
그리고 우주에서 온 이 소녀들의 활동 중
가장 활발하게 빛났다고 생각하는 시기의 3개 미니앨범 시리즈는,
함께 달리고 싶은 비장한 희망의 메시지,
아슬한 관계의 끈을 붙들고 이어 나가는 불안정한 로맨스 서사,
안개처럼 눈을 가린 환상의 분위기와 그 안을 채운 섬세한 세부 요소들로
나에게 그런 작은 세계를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마이너에 대한 사랑은 나를 힘들게 해
: 우주소녀에 관한 소회, 미니 4-6집 앨범 리뷰
마법학교 3부작으로 통칭되는 우주소녀의 4, 5, 6집 미니앨범 시리즈에서는, '비밀이야' 앨범 활동 때 시도했던 것보다 더 감성 짙은 콘셉트로 우주적인 이들의 색깔을 확고하게 만들어 나갔다.
해당 변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발매 당시의 시기적 상황을 부연설명하자면, '비밀이야 (2016)'와 마법학교 3부작 시리즈 (2018 ~ 2019) 사이에는 1년 6개월 가량의 텀이 있고, 그 사이에서는 타이틀곡 '너에게 닿기를 (2017)'과 'HAPPY (2017)'로 대표되는 2개의 앨범이 발매가 되었었다. '비밀이야'에서 보여준 몽환적인 콘셉트는 '너에게 닿기를'에서 가볍고 귀여운 멜로디와 스쿨룩의 힘을 입고 좀 더 친근한 방향으로 조정되기 시작하다, 정규 앨범 'HAPPY'에서 발랄한 컬러팝과 치어리더 콘셉트로 승부수가 던져지며 아예 탈피가 되었었다. 현재로서 돌아볼 때 오히려 '비밀이야'는 단지 염두에 두었던 여러 콘셉트 가운데 한 가지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우주소녀의 팬들에게 잘 만들어졌던 '비밀이야'의 단 한 번의 임팩트가 곧 팀의 정체성인 것으로 인식되리만큼 강했었고, 해당 연관 경로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콘셉트의 타이틀곡 'HAPPY'의 등장은 팬덤의 긍정적인 여론을 사지 못했다. 오히려 커플링곡이자 '비밀이야'와 같은 e.one 프로듀싱 수록곡인 '기적 같은 아이 (Miracle)'에 대한 지지가 그 이상으로 높았어서 아쉬움의 소리를 불식시키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보낸 1년 뒤의 타이밍에서 다음으로 발매된 앨범이 바로, 마법학교 시리즈의 시작을 열었던 미니앨범 4집 [Dream your dream]과 그 타이틀곡 '꿈꾸는 마음으로 (2018)'였다. 언뜻 들었을 때 시리즈명은 유치한 감이 있지만 음악과 전체 콘셉트에서만큼은 기존 특색의 재현과 함께 확실한 진보를 꾀하는 기획이 보였던 앨범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도 시리즈물 미니앨범 [WJ PLEASE?] ('부탁해 (2018)'), [WJ STAY?] ('La La Love (2019)')를 발매하며 연속적인 행보를 이어 갔다.
e.one ☪ ~> Full8loom ✨
이 시리즈가 우주소녀 콘셉트의 '근본' 같은 곡의 자리를 두고 함께 거론되는 '비밀이야' 때와의 차이를 서술하자면, 가장 자명한 것으로는 프로듀서진 변화에 따른 음악적 특징의 변화가 있다. 동시에 가사로부터 비롯되는 감성의 핀트가 달라졌고, 이는 또한 팬들이 느끼는 몰입도 자체를 훨씬 가중시켰다. 또한, '비밀이야'에 비하면 뮤직비디오에서는 힘을 뺀 듯한 감상이 드는 대신, 앨범의 수록곡 구성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 먼저 타이틀곡 음악에서는, 당시 프로듀서 정호현과 최현준을 아울러 말했던 프로듀싱팀 e.one(이원 / 현재는 정호현만 지칭함)이 주가 되어 '비밀이야'를 프로듀싱한 뒤, 이들은 팬들에게 상당히 선호되는 작곡진임에도 불구 이후로는 타이틀곡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우주소녀의 새로운 방향성을 함께 빌드해 간 것은 프로듀서 영광의 얼굴들과 진리를 포함한 프로듀싱팀 Full8loom(풀블룸)이다. 두 팀은 각각의 색깔로 우주소녀를 마법소녀로 만들었다. 참고로 다음 두 프로듀서진의 음악 특색에 관한 묘사는 해박한 음악적 지식에서 기반해 작성한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e.one의 경우(우주소녀 - 비밀이야, 기적 같은 아이, 르네상스 / 에이프릴 - 봄의 나라 이야기, 손을 잡아줘, 인형 / 러블리즈 - 백일몽 / 아이즈원 - Mise-en-Scène, 회전목마 등), 주로 화성이 고전적으로 구성된 와중에 중요한 부분마다 포인트 변주를 주어서 뒤틀어낸 듯한 진행이고, 기타와 스트링 등의 악기는 먹먹한 떨림으로, 신스사운드 악기는 마치 요술 빛가루 같이 자잘하고 빽빽한 느낌으로 표현된다. 특히나 코드 진행에서, 옛날 마법소녀물 OST일 것 같은 낯익은 전개가 있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위치로 꺾이는 변화를 의도적으로 넣으면서 독특한 서정성을 자아내는 게 특색이다. 마치 화려한 반전을 거듭하는 그 사이사이에서의 긴장감, 그 오묘한 감정의 스파크를 무기로 이들은 듣는 재미를 선사한다. 한편, 이들의 이러한 작곡 스타일이 두드러지게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우주소녀의 '비밀이야' 때쯤에서가 맞지만, 이 당시 유사한 스타일로 여러 걸그룹들의 음악을 프로듀싱하게 됐다는 점에서, 우주소녀만의 개성을 발굴해 줄 테일러형 작곡진은 아니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Full8loom의 경우(우주소녀 - 꿈꾸는 마음으로, 부탁해, La La Love, You Got 등)에는 또다른 측면에서 특이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사실 전체 작품들을 본다면 콘셉트 면에서 유사한 스타일의 곡은 거의 만들지 않아서 앞 문단에서와 같이 묶어낼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에, 우주소녀의 마법학교 시리즈를 프로듀싱한 곡들로만 묘사해 보기로 한다. e.one은 전반적으로 가라앉는 상실감을 베이스로 한 과거지향적인 정서가 착착 감기는 맛이라면, Full8loom의 우주소녀 노래들은 상기된 공허함이 해소되지 못하고 계속 떠도는 현재진행형인 불안감이다. 코드 전개는 평범하게 흐르지 않아 기승전결이 명쾌하게 정리되지도 않고(일부 곡에 해당), 일시적인 전조나 조성에서 어긋난 멜로디가 계속 쓰이기도 하는데, 특히 '꿈꾸는 마음으로'와 'La La Love'의 경우에 그러한 특징이 더 선명하다. e.one의 노래의 환상성은 잘 걸어 나가던 길에서 갑작스럽게 종잡을 수 없는 경로로 틀어져버리는 짜릿한 맛에서 나온다면, Full8loom의 노래는 반전을 꾀하지는 않지만 걷고 있는 길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름 위처럼 불안정해서 '위태로움'이라는 상태를 청각화한 것만 같다.
그래서 e.one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하는 멜로디가 주무기인 것과 달리, Full8loom은 공간감과 우주적인 사운드가 주가 되고 그 안에 멜로디를 둥둥 띄워낸 느낌이다. 악기 질감도 Full8loom이 쓰는 기타와 스트링은 쨍하고 화사하며, 신스사운드는 섬세하게 쌓여 있지만 전체 합을 들으면 어둠 속에서 광채가 뻗어 나가는 듯한 스케일이 세공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전적인 느낌을 준다는 측면은 공통적이기도 하지만, e.one은 서정적인 코드 전개 때문에 그렇다면, Full8loom은 마치 세일러문처럼 미래적인 스토리를 구현한 과거의 사운드를 재현한 듯한 고전미다. 비슷하게 '마법소녀'나 '애니메이션' 느낌을 낼지라도 전자는 더 직관적이고 슬픔이 담긴 스토리성을 내포하고, 후자는 그 감정이나 서사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갇히는 폐쇄성이 느껴진다.
🔮 다음으로, 두 작곡진의 타이틀곡은 가사에서도 감성의 명확한 차이를 드러낸다(우주소녀의 활동 시기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가사를 발췌한 것으로, 해당 작사진들의 작사 스타일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한다).
비밀이야 아직 아니야, 숨겨둔 내 맘이야, 아직 널 모르겠어
솔직히 겁이 나서 너무 두려워서 함부로 날 대할까 봐 센 척 하게 돼
날 믿어줘, 이 순간을 꽉 잡아, 더 용기를 줘 나에게
꿈꾸는 마음으로 꿈꾸던 네 품으로 가, 난 안 되면 되게 해
사실 나도 널 알고 싶은걸, 아무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내 맘은 안 그래
어찌할지 몰라 나도 몰래 그러는걸, 애매모호한 사이
내 맘을 두드린 떨림과 애틋한 너의 미소, 난 왜 익숙한 걸까
왠지 너와 나, 이렇게 몇 번이고 만난 것만 같은데
'비밀이야'의 경우 음악이나 시각적으로는 이것저것 예쁘고 판타지한 무기들로 무장했지만, 노래의 본질은 사실 단순히 상대방의 마음에 다가서기 조심스러운 소녀의 연애 감정에 관한 노래로, 흔하고 대중적인 소재에 가깝다. 발매 시기가 2016년임을 생각하면 특히나 그 당시의 걸그룹 노래들에 매끄럽게 묻어가는 귀여운 사랑 이야기에, 비밀이라는 소재를 엮어 베일에 싸인 신비한 콘셉트로 발전시킨 것이다.
한편 마법학교 3부작에 해당하는 타이틀곡들은, 가사에까지 음악과 콘셉트에 일체화된 감성을 싣고서 보다 독자적이고 만화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상황은 불명확하고, 화자와 청자의 관계도 모호하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확신만을 전제한 채로 이들은 함께 있는 감정을 말하거나 떨어져 있는 시간을 극복한다. 서사는 흐릿하고 감정은 선명한 이들 가사는, 화자가 놓인 판타지 세계에 대해 상상하거나 해석할 여지를 폭넓게 허용한다. 보통 아이돌 노래에서 애니메이션 음악 같다고 언급되는 곡들의 가사들이 이런 표현으로 구성돼 있다.
마법학교 3부작
🔮 [Dream your dream] (2018), [WJ PLEASE?] (2018), [WJ STAY?] (2019) 3개의 미니앨범으로 이루어진 우주소녀의 '마법학교 3부작'은 팀의 음악적 개성을 확립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며 코어 팬덤을 공고히 한 시리즈였다. 마법학교라는 이름과 관련된 세계관의 설정으로, 멤버들이 3개의 유닛(꿈 배달부, 꿈 수집가, 꿈 실현자)으로 나뉘어서 뮤직비디오 신과 자켓 사진을 촬영하고 라이브 방송을 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세계관이 3개의 앨범을 연결해 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싶긴 하지만, 3개 팀으로 나뉘어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 외엔 별다른 스토리를 파악할 수 없어서 큰 의미가 있는 설정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일단 우주소녀의 팬들이 세계관이라는 존재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듯함). 그리고 애초에 마법학교라는 배경부터가 그냥 아이들 놀이 같지, 아이돌 콘텐츠로서는 별로 궁금해지거나 흥미로운 소재가 아닌 점이 아쉽다. 다만 그 당시에 내가 너무 좋았던 점은 이 회사에서 앨범에 공들여 보려고 했다는 그 자체였다. 그전까지의 행보에서 낮아졌던 기대감에 힘을 얻어서였는지, 몽환 콘셉트에 별 감흥 없어진 지금도 '꿈꾸는 마음으로' 컴백의 첫 티저가 나왔던 날의 설렘은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 이 시리즈의 각 앨범에는, 타이틀곡을 포함하여 색깔이 강한 2-3곡 정도가 콘셉트의 뼈대를 단단히 잡으며 테마의 농도를 유지하고, 그 안팎으로 밝고 펑키하거나 가볍고 편안한 노래들이 배치돼 있다. 수록곡들이 음악적이거나 감성적인 면에서 타이틀곡의 특성을 잘 이어받고 있고, 특히 애니메이션 음악 같은 요소들이 전반적으로 걸쳐 있기 때문에 타이틀곡이 주는 몰입적이고 서사적인 감상을 앨범 단위로까지 지속할 수 있다.
각 앨범이 담은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해 본 뒤 앨범에 대한 리뷰를 이어가려고 한다. 물론 개별곡들의 특징이 각각 다르게 설계됐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포괄하여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타이틀곡 및 존재감이 강한 수록곡들의 감성을 베이스로 해석해 본 각 미니앨범의 전반적인 테마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Dream your dream]은 잃어버린 상대방을 되찾고 싶은 명확한 감정이 비장함과 희망으로 뒤섞이며 꿈속을 달리는 에너지,
[WJ PLEASE?]는 알 듯 말 듯 손에 잡히지 않는 오묘한 관계 속에서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혀 나가는 불안정한 로맨틱함,
[WJ STAY?]는 함께하는 순간을 붙잡지 못한 모호한 결말 가운데서의 애틋한 그리움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반짝반짝한 회상이다.
Dream your dream (2018)
01 꿈꾸는 마음으로 [★★]
02 호두까기 인형
03 르네상스 [★★]
04 설레는 밤
05 겨울잠
06 꿈꾸는 마음으로 (Chinese Ver.)
*앨범 리뷰의 별점은 [ ], [★], [★★] 3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돌고 돌아갈수록, 애틋해질수록 좋아
난 강해져 너 때문에
🔮 [Dream your dream]은 방향 재설정을 통해 강렬한 몽환 콘셉트로 새로운 시작을 연 전환점과도 같은 앨범이다. 특히 1번과 3번 트랙이 주된 존재감을 발산하면서 팀의 서정적·서사적인 색깔을 강하게 어필하고, 그 외에는 서브 역할을 하는 발랄한 노래들로 채워져 있다. 그 중 가장 메인인 1번 트랙이자 타이틀곡 '꿈꾸는 마음으로'는 화려하지만 불안한 음악의 구성과 상공하는 듯 웅장한 세션을 특징으로 하여,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송처럼 대장정의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 듯한 비장한 희망의 의지를 쏘아 올린다. 드럼과 신스사운드, 베이스와 자잘한 어쿠스틱 악기들, 그리고 멜로디와 보컬 표현까지도 아주 바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흘러가는 이 묵직한 노래는, 이 각각의 사운드 요소들이 양보 없이 드러내는 존재감 간의 신비로운 시너지를 들어 보는 재미가 있다.
나 있잖아, 가끔 아주 아찔한 상상에 빠져들곤 해
스쳐가는 우리, 타인인 듯 우리
모른 채 지나쳐 상상조차 싫어 -꿈꾸는 마음으로
이 노래는 곡을 여는 기점부터 강한 드럼 비트와 쨍한 신스사운드가 어둠을 가르고 뻗어 나가듯이 질주하는 걸 느낄 수 있다.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리듬게임에서 이 곡을 하드모드로 플레이하면 이 구간을 무사히 넘어가는 것이 관건인데,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킥 리듬이 매우 박진감 있다.
도입부에서 설아의 예민한 목소리가 불안정한 멜로디 '나 있잖아'로 운을 떼는 순간부터, 앞서 설명한 Full8loom의 곡 특징인 발 디딜 데 없이 위태로운 코드 진행과 멜로디들이 조각조각나서 이어진다. 이러한 파트들은, 가사로 표현되는 서글프고 서사가 얽힌 듯한 감정이 음악적으로도 연출이 되는 특징이 된다. 오묘한 느낌이 지속되다 프리코러스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스트링은 펼쳐지고 베이스는 하강했다 상승하는 해방감이 짧게 들며 후렴구로 진입한다. 이때 코드 전개가 약간 빠르게 진행되는 느낌이 마치 계단처럼 밟아 오르는 듯 급박하고 벅찬 감상을 준다.
Trust in me, Trust in you / 우린 어떻게든 꼭 만나
찾아낼게, 달려갈게 / 난 강해져 너 때문에 -꿈꾸는 마음으로
후렴구는 청명한 음색에 강한 힘을 한껏 실은 연정, 투명하지만 절박한 감정을 내는 다영, 의지적이고 예리한 수빈의 가창 파트가 각각 고음역의 멜로디를 또박또박 누르고 찌르며 채운다. 여기서 멜로디들은 전반적으로 고음이기는 한데, 화성 자체가 시원하게 익숙한 기승전결 순서대로 해소되지 못해서, 그 위에 얹히는 선율도 그다지 폭발적이지 못하고 답답한 느낌에 그치게 된다. 그 뒤의 포스트코러스에서도 비트감을 전혀 젖히지 않고 나아가지만, 쾌감보다는 오히려 힘이 덜 들어간 서브보컬 성소의 목소리로 여리게 맴도는 감성을 충전하고 '우린 어떻게든 꼭 만나'라며 희망을 띄워내면서 완화하고 간다. 멜로디가 표현하는 감정선의 이 모호한 지점이 아마도 이 곡에 대한 선호와 비선호를 가르는 결정적인 특색이라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선호하는 특성은 아니지만 이 노래 자체가 멋지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안에 녹아든 요소로서 괜찮은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뒤에서는 서브보컬 멤버 4명이 돌아가며 부르는 브릿지 후반부와 설아의 엔딩 파트에서, 이들이 '꿈꾸는 대로 다 이뤄질 거야'라며 주문처럼 외는 가성의 멜로디가 곡의 신비한 분위기를 더욱 흐리게 흩뜨리는데, 특히 브릿지에 쓰인 멜로디와 코드, 스트링 연주가 엔딩으로 그대로 쓰이며 미처 완결지어지지 않은 이야기의 열린 결말처럼 아웃트로가 연출되는 점이 인상깊다. 곡이 전반적으로 뭐 하나 마음 편히 해결된 부분이 없이 공중을 헤매는 듯하지만, 그 전개를 이끄는 것이 가사의 명확한 감정과 강렬한 비트가 되면서, 이 곡이 자아내는 벅차는 서사성이 완성된다.
🔮 또한 이 곡은 화려하고 각 잡힌 퍼포먼스와 무대 의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안무에서는 인트로(0:00)에서 13명의 움직임이 합을 이루며 마법소녀 전사가 등장하고 변신하는 것 같은 장면을 만드는 것부터 시선을 끌고, 도입부에 들어가기 전 다리를 바닥으로 뻗고 구른 뒤 팔과 다리 동작을 하는 구간(0:13)도 절도 있다. 중간의 안무들도 신선한 부분이 많지만 특히나 브릿지 이후의 안무가 독특한데, 보나를 중심으로 도는 원형에 멤버들이 한 명씩 추가되며 지름이 커지고 회전 속도가 빨라지는 부분(2:30), 12명의 멤버가 3명씩 4줄로 서서 한 줄씩 돌아서며 손 안무를 했다가 사라지는 부분(2:42), 그렇게 전부 사라진 멤버들이 팔을 뻗으며 시간차로 일어서는 부분(3:00)이 이어지며 곡의 최고점까지 달려가는 구간이 환상처럼 채워진다. 그러고 단체가 보이는 구도로 이동해서 군무를 선보였다가, 비는 3박자에 딱딱 맞추어 삼각 포메이션으로 이동하는 그림(3:09)도 멋지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마지막 후렴구의 미기 가창 파트인 '난 안 되면 되게 해'(3:17)에서는 미기와 수빈이 서로의 팔을 잡고 몸을 뒤로 젖히며 그 사이에서 성소가 단독 동작을 하는데, 마치 포탈이 열리고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처럼 벅차오르는 순간이 연출된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전 곡들에 비해 멤버 성소의 센터 구간이 많고 모든 성소의 등장 파트에서 빠르게 한 바퀴 돌아서는 동작이 있는데, 해당 동작 자체가 애니메이션 속 변신 같기도 하고, 돌아서서 보이는 얼굴이 성소일 때 느껴지는 비현실적이고 꿈꾸는 듯한 느낌(컨셉추얼하고 판타지 만화적인 얼굴과 피지컬로는 걸그룹 멤버 중에서 이때의 성소 만한 사람은 없었던 듯)도 이 무대가 줘야 하는 카타르시스를 완성한다. 반복 파트 제스처가 다 다른 것도 좋고... 걍 너무 좋다(?). 성소뿐 아니라 애쉬그레이 염색을 시도한 루다와 흑발이 된 선의 등 예쁜 스타일링으로 눈에 띄는 멤버들이 생겼고, 의상에서도 만화 속 주인공들 같은 디테일이 빛나는 제복 스타일이나 원피스 의상들이 눈길을 끌면서, 이 노래와 안무의 색다른 맛이 시각적 재미의 날개까지 달고 끝도 없이 환상적이 된다.
이 곡의 안무가 최영준은 '꿈꾸는 마음으로'와 '부탁해'의 안무를 담당했는데, 그의 안무에서는 전반적으로 우주소녀의 안무를 맡은 다른 안무가들이 팔 동작을 위주로 쓰는 것에 비해서 다리와 몸 전체를 사용하는 안무의 비율이 매우 높다. 때문에 퍼포먼스가 군더더기 없고 강하고 시원하다는 느낌과 함께, 다인원의 군무가 보여줄 수 있는 압도감의 감상이 훨씬 더 강렬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꿈꾸는 마음으로'의 안무는 절도감 넘치는 음악에 맞추어서, 각지고 직선적인 움직임과 중간중간 동반되는 웨이브나 감성 섞인 포인트, 섬세하고 새로운 팔동작들이 합을 만들어내는 전체 그림이 너무 멋지다. 군무도 깔끔하고, 개개인의 표현력도 집중도가 높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후렴구로 들어가는 연정의 가창 파트 안무는 동작이 시원한 맛이 덜하다. 3절에서 다영이 부르는 동일한 멜로디의 파트에서는 하이라이트 구간이라 온 몸을 날리는 데에 비해, 1, 2절에서는 힘이 강하게 들어갔음에도 불구 폭발력이 안 느껴져서 아쉽다. 그 외는 완벽하다.
내 가장 아름다운 시절, 그 이름은 너야
나의 찬란했던 계절 그 중심엔 너잖아
🔮 수록곡으로 넘어가자면, 먼저 태엽을 감는 동화적인 인트로를 내미는 2번 트랙 '호두까기 인형'이 타이틀곡의 경쾌한 박진감과 에너지를 유지한다. 가사에서는 꿈속에서 만난 마법의 세계를 매개로 '너'와 함께할 수 있게 되지만, 이 곡은 마법에 빠져드는 듯한 인트로 사운드가 아웃트로에 수미상관으로 사용되며 다시 마법에서 풀려나는 서사를 암시하면서, 슬픈 감정을 품은 1번과 3번 트랙을 연결한다. 그 외에 인상적인 부분이 있는 곡은 아니다.
그 다음으로 3번 트랙을 들으면 다시금 서글프고 처연한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 '르네상스'[★★]는, 우주소녀의 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수록곡 중 하나이자 이전 앨범에서 타이틀곡으로까지 고려되었다고 언급된 곡으로, 우주소녀 노래가 마니아층을 가질 수 있게 한 특색 중 한 가지인 '슬프지만 강한 서정적 댄스곡'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노래하는 이 이별 노래는, 강한 비트에 감정을 꾹꾹 누른 멜로디와 서지음 작사가의 문학적인 노랫말들이 특징이 되고, 그 주위를 화사한 스트링과 신스사운드들이 꾸며 주면서, 가장 슬픈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꽃피우는 듯한 노래다. 후렴에서는 음역이 높은 고난도의 멜로디가 알차게 꽉꽉 채워지면서 연정을 필두로 한 보컬 멤버들의 가창력이 빛을 발한다.
너도 잊지 않았으면 해
내가 너의 맘에 꽃을 피웠었단 걸
또한 가사가 매우 인상적인 곡이다. '내 가장 아름다운 시절, 그 이름은 너야', '이제 너와 나 춤을 출 거야, 저 달을 벗 삼아' 같은 인상깊은 가사의 구절들이 음악이 주는 인상을 더욱 애타게 만드는 지점이 매력적이기도 하며, '슬픈 예감아 제발 빗나가줄래', '내가 널 기억할게, 미안해 안 해도 돼, 괜찮아 난 정말', '날 떠나야 할 땐 뒤도 돌아보지 마, 그럼 내가 맘이 약해지는걸'처럼 이별이라는 배경 상황을 넌지시 제시하는 직접적인 감정의 가사들은 멤버들의 보컬 연기력을 극대화할 수 있어서 더욱 서사적이다. 가장 좋아하는 우주소녀의 노래 중 하나다. 콘서트 무대로 안무도 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무 없이 노래만 듣는 게 낫다(이 곡뿐만 아니라 우주소녀의 많은 띵곡 수록곡들이 해당됨...).
타이틀곡의 중국어 버전인 마지막 트랙을 제외한 나머지 두 곡인 '설레는 밤'과 '겨울잠'은 우주소녀가 이전 앨범에서까지 보여준 발랄한 무드에 가까운 곡들로, 곡들에 개별적으로 인상깊은 부분은 없지만 앨범의 테마를 끌고 가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해낸다. 신나는 비트와 따뜻한 멜로디로 오묘한 사이의 사랑을 노래하는 '설레는 밤'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삽입곡처럼 귀여운 효과음과 통통 튀는 보컬 표현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말하는 '겨울잠'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그전 트랙에서까지 비장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흐름을 편안하게 풀어내며 감성과 서사를 모두 매듭짓는다.
사실 여타 곡은 평범하게 떠올릴 수 있는 걸그룹의 귀여운 노래들지만, 타이틀곡 '꿈꾸는 마음으로'와 3번 트랙 '르네상스'의 힘이 앨범 전반에 미치는 감성적 영향이 매우 단단하게 보이면서 앨범 전체의 색깔이 그러하게 인지된 케이스다.
WJ PLEASE? (2018)
01 부탁해 [★★]
02 너, 너, 너
03 아이야 [★]
04 가면무도회 [★★]
05 Hurry Up
06 2월의 봄
너를 잘 알아, 느낄 수 있으니까
🔮 [Dream your dream]이 아주 눈에 띄는 색깔을 제시하며 우주소녀만의 콘셉트를 선언한 시도였다면, 이 [WJ PLEASE?]는 그것에 조금 더 깊고 성숙한 감수성을 녹여내어 완전히 굳혀버리는 역할의 앨범이다. 전작의 타이틀곡과 앨범을 이끌고 나가는 것은 어둠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과 에너지였다면, 이 앨범은 어느 정도의 어둑한 상태의 감정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맞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전반적으로 음악에서는 달빛이 내린 듯 영롱한 사운드가, 가사에서는 서로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관계임에도 간절히 닿길 바라 보는 로맨틱한 서사가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이전 앨범에서는 우주소녀의 서정적인 특색이 메인 트랙 2개에 집중적으로 응축돼 있었다면, 이 앨범에서는 전체 트랙에 걸쳐 있다는 점에서 더욱 완성도가 높다고 느껴진다.
목소릴 따라, 너의 호흡을 따라
다 전해져 어떤 아픔 어떤 슬픔 -부탁해
🔮 타이틀곡 '부탁해'는 마이너한 톤과 유려한 선율 위로 서브컬처적인 감성이 은은하게 사무치는 신스팝 곡이다. 인트로를 들으면 고요하게 울리는 필터링된 목소리와 우아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되었다가, 힘 있는 퍼포먼스가 들어갈 법한 비트로 전환된다. 하지만 드럼 리듬과 베이스의 골자가 '꿈꾸는 마음으로'에서의 복잡함보다는 훨씬 정리된 형태로 나타나면서, 강렬함보다는 감성적인 면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그 감성적인 면모는 비트 위로 동동 울리는 EP를 섞은 영롱한 신스사운드와 숨결처럼 흩어지는 보컬 코러스 등을 통해서 전달이 된다.
도입부에서는 거품처럼 돌아다니는 작은 플럭 사운드와 목소리만이 미니멀한 하프 리듬 위를 맴돌다가, 프리코러스에서는 심장 소리가 두근대듯이 하우스 리듬이 들어서고, 해당 파트가 마무리됨과 동시에 다시 리듬이 벌어지며 긴장감을 주는 효과를 낸다. 이렇듯 이 곡은 전작 타이틀곡이 복잡한 리듬을 늦추지 않고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했던 것과 다르게, 비트를 조정하면서 감정을 표현한다.
음악이 덜 바빠진 만큼 이 노래는 보컬이 표현하는 매력도 더 부각된다. 메인·리드보컬 멤버들이 부르는 파트는 감정이 더욱 풍부하게 들어가서 좋고, 서브보컬 멤버들이 소화하는 파트들도 이전에 비해 선율적이거나 파트의 위치가 주목도 높은 것이 많아서 목소리를 더 잘 들어볼 수가 있다(물론 서브보컬 멤버들의 경우, 이 앨범의 기점부터 전부 서브보컬인 중국인 멤버 3명이 활동을 중단함에 따라 다른 멤버들에게 가창 분량이 더해진 점도 영향을 미쳤다). 래퍼인 엑시의 경우에는, 이 시리즈의 다른 두 타이틀곡에서 랩 파트만을 조명하는 집중 구간을 가져가는 것과 달리, 이 곡에서는 곡의 비트 속에서 멜로디와 연결되며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랩을 선보인 점이 좋다.
멤버들 가운데서도 특히 감성적인 음색이 강점인 리드보컬 설아의 매력이 두드러지는데, 여리게 떨리는 감정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설아가 도입부, 후렴구의 일부, 브릿지, 엔딩 등 필요한 위치마다 목소리를 채우고 표정 연기로 시선을 흡수하며, 이 곡의 다정하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태도가 곡의 곳곳으로 물든다. 개인적으로는 설아가 부르는 후렴구의 '목소릴 따라, 너의 호흡을 따라', 엔딩의 '너를 잘 알아, 느낄 수 있으니까' 파트가, 멜로디와 가사도 좋지만 온전히 설아의 목소리가 읽어내면서 발생한 맥락이 존재한다고 느껴져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역시 '목소릴 따라~' 파트가 1절과 2절에서 다른 제스처 안무를 하는 것도 너무 좋다. 위 GIF 이미지 중 두번째에 해당하는 것은, 직전 구간에서의 강한 퍼포먼스가 마쳐지고 비트가 사그라들며 설아가 등장하는 엔딩 부분의 무대인데, 눈빛 연기가 마치 이 곡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져서 인상 깊었다.
너와 나의 귓가에 맴도는 말,
Save me, Save you -부탁해
한편 이 곡은 순간순간 등장하는 오컬트한 연출도 특징적이다. 기본적으로 이 노래의 마이너한 톤 자체가 판타지의 배경을 암시하는 느낌도 있지만, 특히 보컬 코러스를 공기 중에 가득 채워서 먹먹한 감성을 자아내는 기법이 이 오컬트한 매력의 포인트가 된다. 먼저, 이 곡을 맨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내 주의를 끌어간 부분은 1절 프리코러스의 여름의 가창 파트이다. 은서가 앞선 멜로디를 마무리지으며 가성으로 멀리 흩날리고, 그 다음 파트를 부르는 여름은 랩에 가까운 가창을 한다. 그런데 해당 부분에서는 리듬이 비워짐과 동시에 투명하게 쌓인 보컬 코러스들이 먼저 공간을 감싼 뒤 여름의 랩은 반 박자 늦게 등장하는데, 이것이 처음 감상할 때는 순간적으로 어느 것이 주 멜로디인지 헷갈리도록 레이어링이 되어 있어 상당히 오묘하다. 퍼포먼스에서도 여름을 중심으로 모든 멤버들이 색색으로 염색된 긴 머리카락을 크게 돌리며 휘날리는 안무가, 이 오묘한 느낌을 더욱 혼돈 속에 빠뜨리는 듯한 연출을 한다. 그리고 후렴구나 다른 구간들에서도 코러스를 많이 쓴 특징이 들리지만, 특히 브릿지 후반부의 보나와 은서 파트로 표시되는 '너를 잘 알아, 느낄 수 있으니까' 부분의 가성 멜로디와 그에 맞먹는 볼륨의 화음 코러스가 신비롭다. 이 부분은 엔딩에서 설아의 고요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소화되면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 안무는 이전 곡에서와 같은 최영준 안무가의 작품으로, 역시 확실하고 힘이 들어간 동작이 주가 되지만, 곡의 특성에 맞게 곡선적인 특징이 드러나는 안무 비율이 늘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영준 안무의 특성 중 하나는 다인원이더라도 포메이션과 동선을 딱히 복잡하게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인데, 또 그 와중에 킬링 파트가 되는 독특한 인원 활용 구간은 내놓으며 기억에 무대의 인상을 분명하게 남긴다는 점이 강점이기도 하다. '꿈꾸는 마음으로'에서는 그것이 인트로와 브릿지였다면, '부탁해'에서는 브릿지 후반부인 설아 파트(2:57)부터 시작되는 일직선 대형부터 연정의 고음 뒤 3절 후렴구 시작의 단체 런웨이 안무(3:13)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엄청난 흡입력을 자랑한다. 특히 일렬로 서서 다같이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오는 안무는 처음 공개되었을 때 팬들의 반응이 너무 뜨거웠어서 이 곡의 최고 하이라이트로 알려지기도 했다. 위 영상의 버스킹 공연이 바로 이 곡이 처음으로 공개된 선공개 무대였는데, 해당 구간에서 쏟아지는 진실된(?) 함성이 그 첫 순간의 임팩트를 방증한다.
한편 '부탁해'는 음악방송 활동 중에 '꿈꾸는 마음으로'에서보다도 훨씬 더 다양하게 멤버 간 디테일과 스타일을 적용한 무대 의상을 착용한 것으로도 인기가 있기 때문에, 교차편집 무대 영상 등을 감상하면 여러 분위기의 의상을 통해 한계 없이 뻗는 이 곡의 감성을 또한 찾아볼 수 있다.
되돌아가, 너 아닌 그 어떤 것도 싫대
아침이 올 때까지 몇 번이라도
마지막 춤을 추는 상상을 해
🔮 앨범을 이야기하자면, 시리즈의 세 앨범 가운데 가장 유기적이고 응집성 있는 흐름이 인상적인 앨범이다. [WJ PLEASE?]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판타지 로맨스 베이스의 이야기를 선보이면서 감성 짙은 테마를 일관적이고도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앞서 이 앨범에 대한 요약의 말로 '알 듯 말 듯 손에 잡히지 않는 오묘한 관계 속에서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혀 나가는 불안정한 로맨틱함'이라고 언급했는데, 대부분의 곡들이 나타내는 화자의 감정이 관계 불명 또는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놓쳐버린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다가서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앨범에 실린 6곡 가운데 마지막 트랙인 발라드 팬송을 제외한 모든 곡들이 일정 테마를 유지하는 컨셉추얼한 댄스곡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1~4번 트랙은 모두 예쁜 멜로디와 판타지한 느낌이 가득해서 이 앨범의 의도적인 기획이 넌지시 펼쳐진다.
─ '내 맘을 두드린 떨림과 애틋한 너의 미소, 난 왜 익숙한 걸까?' ─ 앞서 이야기한 타이틀곡 '부탁해'[★★]에서 영롱한 건반과 신스사운드가 주가 되며 안개 자욱한 아련한 마이너 감성을 달려 나갔다면,
─ '단 한번 아련히 피고 질 사랑이라면 시작도 안 했을 거야' ─ '너, 너, 너'에서는, 꽃향기 퍼지는 듯한 레트로 신스팝의 눅눅한 텍스처로 마음의 고백을 망설이다 결국 건네버린다.
─ '나를 알아봐 줘, 언젠가 만나러 갈 테니' ─ '아이야'[★]에서는 격정적인 박자감에 담은 애틋한 감정과 애니메이션 같은 서사를 제시한다. 인트로에서 시간을 되돌리는 듯한 리버스 효과 사운드와 새벽으로부터 피어 오르는 듯한 설아의 잔잔한 솔로 보컬이 인상적이고, 이후 급박한 하우스 리듬과 극적인 멜로디, 전투적인 신스사운드가 질주하는 구간과 파워풀한 랩 등이 조화되며 K팝 댄스곡다운 강렬한 색채를 보여준다.
─ '모든 끝이 정해진 이야기처럼, 넌 꿈에서 사라져 가고 나만 혼자 남아' ─ '가면무도회'[★★]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컨셉추얼한 가사 스토리가 뼈대가 되어서, 지브리 애니메이션 분위기의 왈츠 리듬 오케스트레이션이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는 클래식한 인트로와, 곡 중간중간에서의 재지한 건반 연주 등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앞선 곡들에서보다 공간감은 많이 빠져서 곡 기조가 산뜻한 듯하지만, 멜로디와 가사, 멤버들의 보컬 표현에 서글프고 서사적인 감성이 밀도 있게 들어차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곳곳에 포인트가 많은 곡인데, '차차'를 외치며 가사 소재를 살린 후렴구, 2절 프리코러스에서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는 가사 구절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 효과, 후렴 멜로디 '아침이 올 때까지 (몇 번이라도, 몇 번이나)'에 가성 코러스로 밀어넣어진 간절한 마음 등이, 닿을 수 없는 관계에서의 상상과 현실을 섬세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 그 뒤로는 'Hurry Up'이 경쾌한 브라스, 스트링 연주를 동반한 스윙 리듬으로 춤곡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멤버 참여곡인 팬송 발라드곡 '2월의 봄'이 앨범을 마무리한다.
이렇듯 앨범에서의 대부분의 흐름에 우주소녀의 음악과 이미지에 대한 기대에 걸맞는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무드가 있어, 우주소녀가 색깔을 정립하던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앨범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미니앨범이다.
WJ STAY? (2019)
01 La La Love [★★]
02 You Got [★★]
03 1억개의 별
04 그때 우리 [★]
05 칸타빌레(노래하듯이) [★★]
06 12 O'clock
07 우주정거장 [★]
너무 아름다운 너, stay
날 향한 시선, stay
🔮 시리즈를 은은하지만 화려하게 마무리짓는 앨범이다. 이전 앨범들에 비해 타이틀곡의 색깔은 차분한 편이지만, 카니발을 콘셉트로 하여 시선이 꽂히는 다채로운 비주얼과 로맨틱한 음악 색깔을 유지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타이틀곡 'La La Love'는 카니발을 열기에 아주 적합한 오프닝곡이 된다. 이 곡은 작곡진 Full8loom의 특색에 대해 앞서 표현했듯이, 그들 강점인 모호함의 미학의 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곡으로, 화사하긴 하지만 그전 곡들과 비교하면 격정적인 느낌은 많이 빠져 있다. 사뿐하고 매끈하게 걸어나가는, 그러나 그 우아함 속에 복합적인 감정이 겹겹이 응축돼 있는 오묘한 느낌이 매력적인 곡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 노래는, 내가 최초 무대 공개 현장에서 공연으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벅차는 듯한 감상이 묻어 있는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은 인트로에서부터 그러한 매력이 돋보인다. 빛이 드문드문 비치게 조명을 떨어뜨린 듯한 스트링의 스타카토 주법과, 여기저기서 반짝거리는 이펙트가 귀를 사로잡고, 여기에 래퍼 엑시의 영어 내레이션이 겹쳐지면서 더더욱 시네마틱해지는 인트로가 곡의 매혹적인 느낌을 빠른 시간 내에 소개한다. 그 불빛이 번쩍이는 가운데서 도입 가사는 '찰칵, 또 한번 찰칵, 지금 그대로의 널 담겠어'라며, 사진을 찍어 이 순간의 마음을 남기는 행위가 이 노래의 아련한 감정이 비롯되는 소재임을 바로 제시해 준다. 이 곡은 이 소재가 떠올리게 하는 장면과 음악이 맞물리게 되면서, 사운드의 불빛이 터지고 빛나는 분위기, 웅웅 울려대는 공간감이 마치 현란한 사운드스케이프처럼 느껴지게 한다.
놀라워 너의 웃음 한 번에, 너의 손짓 한 번에 봄이 와 -La La Love
그 뒤로 이 곡은 독특하게, 감정선이 상승해야 할 구간들에서 계속해서 긴장감만 더하고 구절의 끝마다 멜로디는 떨어뜨린다(~ 좋아해도 될까?, ~ 그래도 될까, ~ 말까, ~ 흔들어, ~ 맘을 울려, ~ 가둘래, stay, frame, 영원해, ...). 사운드에서는 울렁거리는 베이스, 이곳저곳에서 주의를 끄는 조그만 효과음들 등이 기묘함과 긴장을 조성하는 가운데, 멜로디에서는 후렴구 직전까지 기세가 바닥까지 떨어뜨려지고, 하려던 얘기는 계속해서 토막토막 단절되는 식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빛의 스팽글이 쏟아져내리는 사운드와 함께 후렴구가 활짝 펼쳐지고, 눈부신 화사함이 감싸는 사이로 멜로디가 미끄러진다. '너무 아름다운 너, stay / 날 향한 시선, stay'라는 황홀한 노랫말과 함께 고조되다가도 울컥하는 듯 떨리는 후렴 멜로디는, 굴곡졌지만 역시 시원하게 터지는 느낌은 없다. 다만 이전 타이틀곡들의 무대에서 비장한 표정을 지었던 멤버들이 이 곡의 후렴에서는 환하게 웃게 되는 시각적인 표현으로 정서를 표현할 뿐이다. 이 노래에서 가장 명쾌하게 톡 터지는 지점은 포스트코러스의 훅(La la la la la love)이지만, 금세 쓸쓸한 랩 파트로 장면이 바뀌면서 잠시의 행복감은 뒤로 사라진다. 찬란하고 확신에 찬 순간은 짧고, 그를 위해 빌드하는 희미한 꿈들의 잔향은 오래도록 머무르는 과정들이 바로 이 곡이 아름다운 포인트다.
특히 이 곡의 랩 구간에서는 멋지지만 비극적인 느낌의 피아노 연주와 별빛 효과음들이 굴러다니는 사운드가 아름답다. 또한 이 곡의 특징인 공간감이 더욱 고립되게 파고드는 강조 구간이어서, 해당 파트를 소화하는 래퍼 엑시에게 핀 조명이 떨어뜨려지는 듯한 주목 효과가 가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곡은 아웃트로에서 엑시의 인트로 내레이션이 다시 한번 나와 수미상관을 이루는데, 이 역시 막을 내려 끝맺음하는 듯한 영화적인 연출이 된다.
전반적으로 인상이 강렬하다기보다는 다소 모호하고 복잡미묘한 노래라고 느낄 수 있지만, 확실한 건 이 노래가 영화라면 신파극은 아니니까 좋은 거라는 감상이다. 마법학교 시리즈의 임팩트를 이끌고 달렸던 이전 곡들인 '꿈꾸는 마음으로', '부탁해'가 다소 익숙하고 서사가 중점이 되는 애니메이션의 감성으로 몰입도를 자아냈었다면, 'La La Love'는 감각적으로 공간을 채우는 분위기를 주요한 매력으로 전환하면서 시리즈에 여운을 남기는 곡으로 역할을 했다.
이 밤을 머금은 달에게 그 비밀을 전해 줄 테니
노래하듯이 이 마음 불러요
나는 너의 하루의 끝, '널 좋아해'란 뜻
어떤 기다림도 난 슬프지 않아
🔮 [WJ STAY?]는 함께 해달라고 요청하는 앨범명이나 사진을 찍어 현재를 지속하고 싶어 하는 타이틀곡의 내용에도 불구, 수록곡들이 화자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은 스토리를 암시하는 것이 많다. 앞 두 개 앨범과 비교를 한다면,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양감의 사운드로 몽환적인 색깔을 표현하는 점이 구별되는 특색이라고 느껴진다. 이러한 특성들을 포함해 이 앨범의 테마를 개괄해 보면, 앞서 말했듯 '함께하는 순간을 붙잡지 못한 모호한 결말 가운데서의 애틋한 그리움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반짝반짝한 회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깨지지 않을 Frame, 그 안은 영원해'─ 타이틀곡 'La La Love'[★★]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사운드와 직접적인 가사 소재를 통해서 현재의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고 싶다고 이야기한 뒤에는,
─ '너와 나에게 끝이란 게 있을까?'─ 'You Got'[★★]가 타이틀곡의 레트로한 분위기를 이은 사운드와 그 안을 맴도는 아득한 멜로디로 새로운 이야기로의 전환을 이룬다. 현란한 베이스 무빙과 금속적인 악기들의 입체적인 배치로 어두운 공간에 금빛 조명이 퍼져 있는 듯 그려낸 이 곡은, 시티팝 느낌을 믹스한 듯한 악기 질감과 공간감이 특색이다. 특히 인트로와 아웃트로에서 등장하는 'Baby you got what I need ~' 반복 파트는 공허하게 울리는 믹싱이 제대로 그 감성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퍼포먼스를 하는 이 곡의 콘서트 무대를 보면, 마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옛날 아이돌처럼 느껴진다.
또한 이 노래는 가사의 감성 면에서 우주소녀의 노래 가운데 인상적인 개성을 갖는 곡 중 하나다. 벗어나려 애써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이 곡의 관점은, 그전까지의 우주소녀의 노래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멤버 중 한 명이 브릿지의 '그만하자, 뭐가 남아' 파트를 보고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언급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 멤버들의 보컬 표현에서도 다른 곡들에서와 다른 뉘앙스를 들어볼 수가 있는데, 특히 멤버 가운데서도 메인보컬 수빈의 날카로우면서도 감정이 공명하는 목소리가 잘 빛난 노래라고 생각한다.
─ 3번 트랙 '1억개의 별'은 이 앨범에서 유일한 발라드곡으로, 개인적으로 우주소녀의 발라드 중에서는 듣기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원래 아이돌 그룹의 발라드를 그닥 좋아하지 않음) 3번 트랙으로 배치된 점이 아쉽다. 아마 멤버 자작 팬송을 마지막 트랙으로 두기 위해서 밀려 올라온 건 아닐까 싶지만 어쨌든 산통 깬다. 별, 빛, 밤의 키워드를 강조하는 점은 앨범과 어울려서 좋다.
─ '난 해가 진 어두운 밤, 보이지 않는 너의 그림자를 밟고 있어'─ '그때 우리'[★]는 산뜻한 피아노와 스트링 연주가 향수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밝고 아련한 멜로디와 가사가 지나간 첫사랑의 기억을 회상하는 미디엄템포 곡이다.
─ '고조되는 선율 속에 못다한 진심이 쉬지 않고 달려가'─ '칸타빌레(노래하듯이)'[★★]는 달콤하게 빛나는 벨과 피리 같은 신스사운드, 나풀거리는 스트링 등 예쁘고 감성적인 악기들로 비밀스러운 느낌이 찰랑이는 노래다. 들으면 쉽게 감겨버리는 애니메이션 감성의 후렴 멜로디, 이에 대치시켜 넣은 반전적인 편곡 등 감상 포인트가 많다. 개인적으로 'You Got' 다음 트랙으로 나왔다면 잘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노래다.
─ '12시가 될 때 한 줄기 빛으로 꿈을 남길게'─ '12 O'clock'는 명랑한 브라스와 재즈스러운 건반 연주 등이 만드는 경쾌한 스윙 느낌이 기반이 되는 곡으로, [WJ PLEASE?] 앨범의 'Hurry Up'에 대응되는 감초 트랙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마냥 발랄하고 즐거운 'Hurry Up'과 비교하면 후렴과 포스트코러스를 통해 가져가는 입체적인 감성이 조금 더 독특한 부분이 있다. 12시가 되면 사라져버리는 소녀들의 신데렐라 모티브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전 곡과 동화적인 감성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 '우린 어쩔 수 없는 사이야
떼놓으려 해도 네 주윌 자꾸 맴돌면 언젠간 가까워질 수 있겠지'─ '우주정거장'[★]은 이 앨범의 소소하게 반짝이는 무드를 마무리하는 최고의 노래일 것 같다. 팬송이지만 앨범에서 음악적으로도 자연스럽게 흐름 속에 묻는 노래다. 반짝이들이 콕콕 박힌 미니멀한 편곡과 녹아들어가는 조심스러운 멜로디, 멀리 떨어진 거리를 사이에 둔 관계의 사랑스러운 노랫말의 조합이 좋다.
이렇게 [WJ STAY?]는 벅차고 절박한 느낌까지 들었던 이전 앨범들에 비해 가볍고 선선한 곡이 많고, 전반적인 음악 기조가 아무렇지 않은 기분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이야기는, 금방 사라져버릴 것 같거나, 이미 떠났거나, 시간이 오래 지났거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등등의 다양한 사유와 배경을 품으며 애틋한 감성을 동반하는 점이 감상 포인트가 된다. 시리즈의 마지막 단계로서, 가장 고점 단계에서의 감정은 이미 떠나보낸 후의 여운이 예쁘게 담긴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마이너에 대한 사랑은 나를 힘들게 해
덕질이란 한때 내가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하고 쓰기도 하는 일 같다. 그 '나만 아는 작은 세계'라는 사실은, 단순히 처음의 좋다는 감정 이상의 특별한 애틋함과 몰입감을 느끼게 한다. 어쨌든 이것은 마이너를 사랑하는 이들이 가지는 합리적인 이유다.
하지만 또한 양가적으로, 우리는 누군가에겐 중심인 이 작은 세계가 더 큰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기도 한다. 사실 케이팝을 포함한 모든 상업 장르에서는 생산자의 비즈니스와 소비자의 놀이터가 커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이런 중소 기획사에서는, 인기가 많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떠나서 팀의 존재와 유지 여부 자체가 그런 것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나는 그런 요소는 차치하고, 그냥 이들의 음악과 콘텐츠가 주는 마이너한 맛이 좋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전에 이런 것이 취향인 적이 없었던 나에게 이들로 인해서 새로운 장르가 내 안에 개척돼버렸고, 여기에 너무나 빠져 있었던 시기를 보냈고, 나름대로 즐거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런 색깔의 팀이 내재하는 존속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마이너스러운 이 특색의 매력은 즐기게 됐으면서도 관성적으로 팀은 메이저가 되기를 바랐던 내 마음은, 그때는 몰랐지만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내가 사랑했던 이 노래들의 무게감은 내가 이들이 조금만 더 수면 위로 떠올랐으면 싶었던 마음을 방해했다. 내가 사랑했던 멤버들의 뜨거울 만큼 열정 있던 눈빛은 너무 복잡한 이 음악들의 감정에 뒤섞여 모호하게 감춰졌다. 환상, 상실, 오묘함, 비장함과 같은 이들이 그려낸 장면들은 아련해서 예뻤지만 직관적이지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면모들은 한편으로 내가 가진 또다른 욕심과 충돌하는 구조를 벗어날 수 없었고, 마이너함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렇게 팀 존속의 한계 앞에 불온전하게 남았다.
🗝🔮☪
왜 나는 <달빛천사>라는 만화를 본 적도 없는데 'Eternal Snow'를 들으면 울컥한 기분이 드는 듯한 가짜 추억이 생겨버린 걸까? 왜 루나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용신 성우의 'New Future' 대학교 축제 영상을 보고 나면 마치 내가 어릴 적에 만화 속 노래하는 마법소녀를 엄청나게 좋아했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까?
어쨌건간에 데뷔 시절에 좋아했던 한 아이돌의 역사가 무려 7년이 지나서 재계약을 논의해야 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은 나의 개인사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이 흔적이 된 이 가짜 추억은 때로는 마치 진짜인 것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마치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런 마법소녀 노래들이 취향이었던 것처럼, 마이너 감성에 마음이 가는 게 내 습성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원래 모든 덕질은 나의 취향을 깨닫게 해주는 면이 있지만, 우주소녀는 마치 아주 어릴 적에 만나야 했던 마법소녀를 성인이 돼서 잠깐 만났다 떠난 듯 일시적인 취향이 되어줬다는 점이 재밌다.
우주소녀를 좋아했던 날들 중에서도 이 글을 통해 소개한 마법학교 앨범 시리즈는 가장 즐거웠던 시기다. 가장 좋아했던 노래를 물으면 '비밀이야'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때가 그냥 너무 재밌었다. 마법학교 3부작 시리즈는 각 발매를 거듭할수록 고조되던 기대감과, 그 이상으로 부합했던 결과물의 합이 계속해서 더 폭발적인 만족감을 빚으면서, 당시 멤버를 좋아했던 팬심과 노래, 무대에 대한 몰입이 예상 외의 정도로 이끌어내어졌다. 사실 나에게 그런 적은 우주소녀 전후로 없었어서 이 시기는 더 특별하게 즐거웠던 것 같다. 이렇게 좋은 노래들을 뒤늦게 발굴해내는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맞을 수가 있는 게 데뷔팬의 특권일까...
최근에는 몇 년에 걸쳐서 음악 취향이 바뀌어서 이 시기의 무거운 아이돌 노래들을 웬만해서는 잘 다시 꺼내 보지 않았는데, 시간 여유가 생겨 내 덕질사를 돌아보다 그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시리즈 얘기를 써놓아 보고 싶었다.
사랑이란 몰까?...
이런저런 아쉬움을 이야기했어도,
어쨌든 그 복잡함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하게 빛나는 존재, 내 최애(ㅋㅋ)가 있었기 때문에
이때 내 세상은 나름대로 분명하게 즐거웠다.
#토비레코드: 주로 K팝 얘기하는 블로그 [ rtbs.tistory.com ]
'k-pop review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이티즈 「TREASURE」 5부작 시리즈 앨범 리뷰: 너, 내 동료가 돼라! <에이티즈 승선기> (0) | 2023.06.17 |
---|---|
관상에 힙이 없는 소녀들과, 세상에서 제일 힙한 노래 - 트리플에스(tripleS) 'Rising' 리뷰 (0) | 2023.05.30 |
우주소녀에 관한 소회 (1/2): 소장 욕구와 여돌 덕질의 상관관계 ['비밀이야' 분석 리뷰] (0) | 2023.04.15 |
레드벨벳 'Feel My Rhythm' 리뷰: 진공 속에 눌러 담은 꽃과 물의 정원 (0) | 2023.03.28 |
무지갯빛 미래를 파는 네오컬처 골동품 상점 ✧˚⋆꙳。 -NCT DREAM 정규앨범 [Hello Future] & [Glitch Mode]를 듣고 (0) | 2023.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