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3. 14:24ㆍk-pop review & essay
어릴 때부터 늘 좋은 노래를 들으면, 이런 노래는 어떤 사람이 만드는 건지가 궁금해졌다. 특히 고작 3분짜리 노래에 뭔가 오래도록 얽힌 이야기가 느껴지는 것 같을 때 그 노래를 더 좋아했고 창작자가 더 궁금했다.
내가 노래라는 것을 듣기 시작한 것은 아이돌 후크송이 유행했을 때고, 지금도 그때 들었던 후크송들을 여전히 다 좋아한다. 하지만 그 모든 노래에서 뭔가 '와닿는다'는 걸 느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아이돌 노래에 과몰입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노래들 때문이었다.
샤이니 '줄리엣 '(2009) "그대 두 눈이 간절히 나를 원한다 했잖아요~"
카라 '허니' (2009) "난 난 난 너없으면 난..."
레인보우 'A' (2010) "널 내리누르고 또 조르고 뭘 모르고 또 바라고 있어~"
등등...
이 당시 아이돌 시장에서 제일 중요시되던 중독성은 완벽하게 갖춰서 착착 감기면서도, 뭔가 그 평면적인 후크에서 화자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입체적이고 드라마틱한 뭔가가 있을 것만 같은 가사와 멜로디의... 이 미묘한 감성을 느끼게 하는 몇몇 노래들에 꽂혀서, 나는 이런 노래를 만든 사람들을 궁금해 하고 그 사람들이 만든 또 다른 노래들을 듣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위 카라와 레인보우 노래를 만들었고 또 바로 얼마 뒤에 인피니트와 보이프렌드 노래들을 만들어서 내 인생 일부를 K팝에 손쉽게 저당잡았던 스윗튠(가운데서도 한재호, 김승수)이었다.
그들이 만든 레인보우의 'A'가 나온 해인 2010년 말에는, 아이유의 '좋은 날'이 나왔다. 이 노래는 나에게 너무 충격이었어서 나온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지금 들으면 그때 떠올린 생각들이 그대로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한바탕 흔드는 병맛 후크 파티 사이에 묘하게 심어놓은 드라마틱한 감성을 찔끔찔끔 맛보던 것만으로도 너무 달콤했던 나한테, 한 편의 영화 같은 감정선의 3분을 통째로 던져준 이 노래는 정말 너무나도 센세이셔널했고 눈물나게 좋았다... 음악이란 것에 눈을 뜬 지 불과 2년 정도밖에 안 된 케이팝 뉴비 시절이었다.
아이돌 댄스곡이 이렇게 선율적일 수 있었는지, 이렇게 클래식한 악기가 많이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처음 들어봐서 느낀 충격에,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그게 이민수라는 작곡가고, 내가 좋아했던 '잔소리'를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늘 이민수를 찾으면 김이나 작사가가 같이 나왔는데, 아마 우결에 나와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사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두 사람 다 언제쯤 처음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다소 불확실하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너랑 나'가 나왔고, 이 노래 역시 당연히 사랑했지만 이번엔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서 너무 행복해져서 이건 또 누가 만들었는지 찾아봤다. 이때 황수아 감독을 처음 알게 되면서 내가 좋아한 가인과 써니힐 노래들에도 이 사람이 이민수 김이나와 함께 참여했었다는 걸 알았다. 이 조합을 또 따로 검색해 보다가 조영철이라는 총괄 프로듀서가 이 세 사람과 늘 같이 작업하는 사람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이렇게 한 명씩 알아가면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가수와 노래들도 많아졌고, 놀랍게도 정말 모든 것이 다 좋아서, 그 뒤로는 그냥 신곡을 기웃거릴 때 이 사람들 이름이 없는지를 따로 검색해서 노래를 찾아 들었다.
이 네 사람이자 혹자는 조영철 사단(검색해 보니 조이김황이라고도 부르더라...)으로도 부르는 이들의 합은 아마 공식적으로 묶인 팀은 아니지만 로엔과 에이팝의 여러 아티스트 앨범을 제작하면서 마니아층을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그 마니아층이기 때문에 아마 조영철 사단 같은 별칭따윈 모르는 대중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이들이 만든 노래를 대면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노래나 프로듀싱이 특색이 강하고 컨셉추얼하긴 하지만 동시에 너무 명곡이고 대중적이어서, 마니아만 잡은 것이 아니라 대중부터 잡았기 때문에 더 특별한 팀이다.
조영철×이민수×김이나×황수아의 메르헨 유니버스 (1) 아이유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좋아한 거냐? 라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들 작업물이 가지는 특성은 서정성, 서사성, 환상성 등으로 대표되며, 이는 아티스트에 따라서 클래식한 세션 또는 일렉트로닉함 / 유려한 멜로디 또는 중독적인 후크 / 동화적 비주얼 또는 그로테스크함 등으로 다양하게 표출된다. 대체로 귀에 잘 들어오는 강렬함이 있지만, 단순히 대중성과 이지리스닝만 강조되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작곡가와 작사가 둘 다 캐치 포인트와 작품성을 모두 챙기는 데에 천재다.
이들은 곡에 깊이를 더하는 수단으로 정교한 서사와 메타포를 연출한 뮤직비디오를 자주 활용하기도 한다. 물 흐르듯 들을 수 있는 대중적인 곡에서조차 스토리텔링이 섬세하게 숨어 있다는 점이 더욱 재미있고 사색적인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며, 영상을 통해 음악을 완성시킴으로써 종합예술의 면모가 있는 K팝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의 기획은 각 아티스트의 속성과 내면을 반영해서 캐릭터를 구축하는 한편, 동시에 고전적이거나 동화스러운 요소를 퓨전적으로 포함하는 일정한 환상성 연출을 한다. 이를 통해 '환상적인 이야기를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리면서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고, '현대적·현실적인 메시지를 환상적으로' 전달해서 묘하고 아이러니한 감상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들은 이 두 가지 방향성을 다양한 개성의 아티스트를 통해 자유롭게 취했다.
이들 조합이 남긴 아티스트들의 초상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신비함이 있지만, 또 그 정교한 짜임새로 인해 생생하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이들이 각 아티스트에게 서로 다른 캐릭터를 어떻게 부여했는지 이어서 3편으로 나누어 리뷰해 보려고 한다.
<2편> 가인: 상처는 영원히 내 안에 새기는 것, 사랑은 달콤하지만 유한한 것
<3편> 써니힐: 세상의 굴레 안팎에서, 세상의 법칙 향한 조소
[ 아이유 IU ]
엇갈리는 마음, 기로에 선 소녀
위 프로듀서진이 기획한 이들이 기획한 다른 아티스트 중에는, 환상적인 작법으로 풀어내더라도 결국에는 인간군상의 메시지로 귀결되는 이들이 많은데, 이 시기의 아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메르헨 판타지다. 어느 공간인지, 어느 시대인지도 잘 모르겠는, 현실과 분리되는 의미로서의 '동화스러움'을 무기로 했던 때다.
아이유 자신도 비슷하게 언급했듯, '너랑 나' 시기까지의 목소리가 아티스트의 솔직담백한 톤이 담긴 모습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종류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수도 아이유뿐이었다는 점이다. 호텔 델루나 장만월을, 달의 연인 해수를 좋아하는 것처럼, 이때의 아이유도 이때의 모습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 강렬한 캐릭터를 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부담없는 노래를 하는 지금의 음악이 현재 감성의 관점에서는 더 시대에 적합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추억 속에 그려져 있는 이때의 모습도 너무나 좋다. 모든 기획 요소가 합일이 돼서 완벽한 동화 한 편들로 남아있는 이 앨범들은 부정할 수 없이 아이유가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그 자체다.
[ Best Discography ]
좋은 날 [Real] (2010)
“ 이런 나를 보고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말아요
─ 귀여운 소녀 모습으로, 무려 2010년에 이렇게 선율적인 댄스곡으로, 그것도 연말에, 아이돌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으로 나타나서 단숨에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로의 도약으로 초전박살 내버린 데는 이유가 있다. '좋은 날'은 대중성과 작품성의 균형, 또 가창력과 아이돌 이미지의 균형을 모두 50 대 50도 아닌 100과 100으로 꽉꽉 채웠다.
중독적으로 토막난 일렉트로닉 댄스곡이 전성기를 누리던 이 당시에 깨끗하게 이어지는 멜로디와 실제 악기의 사운드가 이루는 댄스 음악의 승리란, 시대에 맞선 승부수이자 한편으로는 시대의 목마름을 읽어낸 선구적 전략의 승리이기도 했다. 이 곡의 사운드는 스트링, 브라스, 오르간 같은 클래식한 악기 구성의 앙상블 실연이 주되며, 과도함 없이 깔끔하지만 풍성하게 꽉 차 있다. 그 정교한 세션 배치는 심심치 않은 변화를 추구하기도 하는데, 4번이나 등장하는 똑같은 벌스 테마에 각각 다른 4가지 악기를 투입하는 구간에서 들어볼 수 있다. 외로운 감성을 노래하는 아이유의 목소리를 풍성한 코러스가 돕고, 또 아이유와 악기 소리가 멜로디를 주고 받기도 하는 것이 마치 뮤지컬 구성을 보는 듯도 하다.
서정적이지만 고음역에서 노는 강력한 멜로디는, 맑으면서도 간절한 음색과 만나 정통적인 소녀 감성을 극대화한다. 그렇게 흘러가다가, '아이쿠, 하나, 둘!' 하는 귀여운 추임새에 방심하는 그 지점에서 말도 안 되게 '3단 고음'으로 회심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초고음이 노림수로 들어갔지만, 반전과 가창력이 만난 이 사랑스러운 파괴력은 전국민이 보는 아이유의 위상을 '3단 고음을 듣기 전과 후'로 갈라버리는 임팩트를 선사했다.
─ 또 '좋은 날'의 양면적 매력은 콘셉트와 실력의 반전에만 있지 않다. 이 곡은 음악적으로는 밝고 즐겁지만 가사는 그렇지 않다.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모티브가 된 이 가사에서 화자는 짝사랑 끝에 고백을 하지만 결국 상심한다. 짝사랑 대상으로 '오빠'를 외친 것은 가요계에 캐릭터를 뿌리내리고자 한 전략적 포인트일 수 있으나, 들여다보면 위 같은 감정선으로 인해 마냥 애교스럽지는 못하다는 역설적 재미가 있다. 물론 화자의 심정이 순수한 문체를 거쳐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마음이 동하는 효과는 덤이다.
─ 뮤직비디오와 스타일링은 유화로 그려낸 듯하다. 어떤 이국적인 분위기의 겨울 거리와 건물들을 꾸민 세트는 아기자기하다 못해 동심을 자극한다. 의상은 라인이 똑 떨어지는 원피스와 스커트만 고수했고, 무지개 일곱 색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선명한 컬러감으로 옷은 물론 구두에 스타킹까지 맞추었다. 여기에 헤어까지 볼륨감 없는 생머리만 유지하며, 당시로서도 약간은 복고스러운 스타일로 동화책에서 그림으로 볼 법한 독특한 개성을 연출했다.
─ 예쁘게 포장된 아픈 첫사랑의 정서는 앨범 전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Real]에는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같은 시즌성 곡도 있지만 그 외에는 모두 미디움 템포와 발라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체로 이별한 상황에서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했다. 수록곡 대부분이 알려진 곡인 완성도 있는 앨범이지만, 그 가운데 윤종신 작곡 곡인 '첫 이별 그날 밤'이 '수고했어 사랑, 고생했지 나의 사랑'이라는 한 문구의 임팩트로 인해 특히나 캐치하게 좋은 감성 발라드로 꼽힌다. 존재감이 크게 부각되는 수록곡이 있는 앨범은 아니나, 일기처럼 아기자기하게 정리된 감성이 아이유의 표현력 및 이미지와 만나 시너지를 발휘했다.
─ 그럭저럭 아는 가수의 신곡을 듣는 순간 대형 스타가 될 것이란 직감이 내리꽂히는 걸 느낄 기회는 한 시대 동안 몇 번 되지 않는다. 아마 이 시기에 추억이 있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날'이 그런 기억이었을 듯하다. 아이돌인지 아티스트인지 모호하게 불리던 시점에 아이유는 이 곡으로 인해 일순간 최고의 아이돌이자 최고의 실력자로 올라섰다. '좋은 날'은 10년도 더 지난 곡이지만 일말의 시대성(촌티라는 뜻...)이 느껴지지 않는, 또 다른 의미의 클래식이다.
─ Best B-Sides: 이게 아닌데, 느리게 하는 일, 첫 이별 그날 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Feat. 천둥 Of MBLAQ)
너랑 나 [Last Fantasy] (2011)
“ 네가 있을 미래에서 혹시 내가 헤맨다면
─ '좋은 날'이 어디엔가 있을 법한 소녀의 이야기, 어느 누군가는 공감할 법한 감정을 마치 동화인 것처럼 그려냈다면, '너랑 나'는 미지의 세계를 모험시켜 주는 판타지 그 자체다. 어른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는 소년을 빨리 보고 싶어서 시간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는 소녀가 어디 있을까? 말도 안 되지만 그 심정을 노래로 듣는 자체로 너무 애틋하고 좋은 거다. 또 만약 그런 상상 속 주인공이 세상 어딘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만 같은 거다. '좋은 날'로 쌓아 올린 아이유의 파괴적 러블리함은, 이렇게 '너랑 나'를 통해 환상 열차를 타고 시간의 벽을 꿰뚫으며 또 하나의 동화 속으로 대중을 초대했다.
─ '너랑 나'는 음악, 가사, 뮤직비디오 모두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맞물리며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를 완성했다. 곡을 따뜻하게 꾸미는 스트링은 물론 웅장함을 채우는 호른, 반짝임을 흩뿌리는 하프 소리 등이 금빛 가득한 곡 분위기를 조성한다. 멜로디와 보컬 면에서는 간절한 힘이 들어갔다는 점이 전작과 공통적이지만, 또 비슷한 듯 다른 차이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날'이 표현하는 짝사랑의 심정이 아이유의 보컬에 긴장되고 서글픈 감정을 눌러 담았다면, '너랑 나'는 심지 강한 후렴 멜로디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꿈에 부풀어 있는 감정으로 아련하게 힘을 푼 창법을 구사한다.
“ 눈 깜박하면 어른이 될 거예요
날 알아보겠죠 그댄 기억하겠죠, 그래 기묘했던 아이 ”
곡의 스토리는 가사와 뮤직비디오를 통해 전달된다. '지금은 안 되는' 너와 나를 만나게 하기 위해 '시계를 보채' 미래로 가고 싶어 하는 아이유는, 뮤직비디오에서는 장난감 기찻길과 기계 장치들이 둘러싼 방에서 시간 여행을 연구하고, 시계 톱니바퀴가 가득한 공간에서 춤을 춘다. 비현실적인 장면 속에서 섬세한 감정을 연기하는 아이유는 만화 캐릭터보다도 더 귀엽고 신비한 모습이다. 예쁜 가사 표현과 공간 연출에는 플롯이 힘을 실으며, 단순한 감각적 이미지가 아닌 명확한 이야기로서 곡의 방향성을 꽉 잡아 준다.
─ 스타일링의 경우, 그림 같지만 다소 단조롭기도 했던 '좋은 날'에서보다 풍성하고 사랑스럽게 발전했다. 뮤직비디오와 방송 무대에서 선보인 미네트 패션과 양갈래 헤어 역시 인형 같은 '너랑 나' 캐릭터를 완성한 포인트다. 깔끔하지만 사랑스러운 카라 원피스는 곡의 동화적 분위기 형성을 돕기도 했지만, 여자 팬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해 유행을 부르기도 했다. 또 곡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양갈래 헤어스타일은 높낮이, 웨이브 강도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었으며, 생머리만 고수한 전작 활동과 달리 물결 웨이브와 '벼머리' 등으로 무대에 서기도 하며 훨씬 다양하고 트렌디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 스타일링 때문에, 음악 방송 무대를 감상하면 발매 시점이 단 1년 먼저인 '좋은 날'은 훨씬 이전의 세대처럼 느껴지고, '너랑 나'는 최근의 아이돌 스타일과도 별 차이가 없다고 여길 수 있다.
─ 실제로 아이유의 마지막 10대를 장식하기 위해서 20살이 되기를 앞둔 겨울에 발매된 이 앨범에는, 이 나이대 아티스트만이 소화할 수 있는 귀여운 음악과 10대 청소년 같은 과도기적 감수성이 동화적 테마 속에 넘치게 담겼다. 타이틀을 제외하면 소박하고 잔잔한 감성을 담은 전작 [Real]과는 다르게, [Last Fantasy]는 전곡 각각이 명확한 자신의 영역을 어필하는 화려한 앨범이다. 화제가 되었던 초호화 작곡진과 피쳐링 군단들의 농도 짙은 감성은 다음과 같이 개별곡들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튀어나오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구성을 이루었다.
'비밀', 'Last Fantasy' 같은 대곡은 판타지 영화 주인공 같은 스케일을, '삼촌', '사랑니', 'Teacher' 같은 키워드의 곡들은 십대 소녀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강렬하게 대변한다. 윤상의 '잠자는 숲 속의 왕자' (알로 리메이크), 김광진의 '별을 찾는 아이', 윤종신의 '벽지무늬', 김현철의 'Everything's Alright' 등은 고전적 향수의 감성과 당대 최고 트렌드인 목소리가 교감을 성사하는 지점이다. 또 앨범의 후반 세 곡은 새벽이 기우는 듯 센치한 감성을 늘어뜨린다. 산뜻하고 예쁘게 힘을 준 곡들을 모아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Last Fantasy]는, 비록 매끄러운 흐름을 강조하는 완행열차 같은 앨범은 아니지만, 아이유의 유일무이한 캐릭터와 음악에 대한 기대감에 대해 초강수의 다이나믹함으로 답한 멋진 방식이다.
─ Best B-Sides: 비밀, 잠자는 숲 속의 왕자 (Feat. 윤상), 별을 찾는 아이 (Feat. 김광진), 벽지무늬, 사랑니, Everything's Alright (Feat. 김현철), Last Fantasy, Teacher (Feat. Ra.D)
분홍신 [Modern Times] (2013)
“ 너의 시간이 내게 멈춰 있길 바래
─ 흑백 필름 안에서 빈티지한 음악이 복작복작하지만 선명하게 돌아간다. 전곡을 쭉 듣고 있자면 재즈, 스윙, 보사노바, 라틴 등의 클래식한 특색들이 엉켜서 시대를 역행한 듯 길을 잃고 만다. 판타지는 판타지인데, 동화는 동화인데, 어쩐지 그전과는 다른 종류의 생동감이 노이즈처럼 귀를 간질이는 이 앨범은,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변화를 꾀한 흔적이 어둑한 색감과 성숙함으로 묻어난다.
─ '좋은 날'과 '너랑 나'의 제목이 아이돌 음악치고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 조합을 아이유의 오리지널리티로 점유해 버린 케이스라면, '분홍신'은 이와 달리 유명한 동화 제목을 차용하여 그 컨셉추얼함을 숨김없이 선전포고한 작명이다. 곡은 예상과 빗나가지 않게 화려한 스케일과 독특한 구성이 돋보인다. 하지만 기존의 마냥 예쁘고 사랑스러운 판타지와는 다르게 조금은 낯설고 고전적이며, 흥겹고 여유로운 리듬을 장착한 곡이다. 가사 내용도 앞선 두 곡에 비해 직관적이지 않고,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야 읽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간마다 변화하는 보컬 톤은 화자의 시점을 이리저리 옮기며 곡을 흥미진진하게 전개시킨다. 곡의 절정에서 다급하게 발을 굴리는 안무와 함께 마구잡이로 변화하는 템포는 곡의 모티브를 드러낸 익살스러운 포인트로, '빨간 구두' 동화 속 춤 추는 구두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 가사와 뮤직비디오가 꾀하고자 한 변화에 차이가 나는 점 역시 재미있다. 먼저 가사는 자아중심적으로 변했다. 그전에 '너'를 너무 좋아해서 짝사랑하고 찾아 헤매던 모든 노랫말이 타인을 향해 있었다면, '분홍신'은 보다 자기 자신의 운명에 귀 기울이는 노래다. 표면적으로는 사랑을 주제로 하여 상대방을 설정하고 그를 찾아가 만나는 내용이지만, 그 과정에서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르지', '기다리기만 하는 내가 아냐' 같은 적극성, '좋은 구둘 신으면 더 좋은 데로 간다며', '그냥 두 눈 감기로 해' 등에서 알 수 있는 운명론적 태도 등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정서가 드러난다. '잃어버린 널 찾고 싶고, 떠나기 싫은' 마음은 애틋하지만, 운명이 닿는 곳을 따라가겠다 몸을 맡기는 이면에서는 기존의 순애보적 사랑과는 다른 자유로운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반면 뮤직비디오는 타인 속의 모습을 비춘다. 혼자 짝사랑하다 거절당하고 혼자 소년을 바라보던 아이유는, '분홍신' 뮤직비디오에서 마음이 맞는 이들을 만나 집단 속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다 사랑을 하기도 한다. 가사와 비디오 모두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을 탈피해 아이유를 자유롭게 풀어주(?)고자 한 의도가 보이면서도 그것이 결과물로 나타난 양상이 달라, 더욱 큰 보폭의 변화가 감각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 의상과 액세서리는 훨씬 드레시하고 화려하게 무대의 동화적 분위기를 꾸미며, 특이하게 무대 방송 기간 동안 헤어 스타일링이 여러 번 바뀐다. 메인 스타일은 금발과 갈색이 섞인 에스닉 분위기의 샌디블론드였지만, 빨강머리, 흑발, 흑갈색 단발로 무려 4단계에 걸쳐 헤어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변화 역시 아티스트의 의지, 스스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좀 더 반영된 결과물이지 않을지 생각한다.
─ 수록곡을 통해 듣는 음악적 변화는 더욱 직접적이다. 1번 트랙이자 날카로운 연애 감정을 들려주는 '을의 연애 (With 박주원)', 그리고 이를 잇는 매혹적인 무드의 '누구나 비밀은 있다 (Feat. 가인 Of Brown Eyed Girls)', '입술 사이 (50cm)'는 전작들의 이미지를 뒤엎는 공격적인 변화를 선포한다. 무성영화의 테마를 따와 찰리 채플린을 소환하는 경쾌한 재즈 'Modern Times'는 타이틀 뒤에 이어 나오며 앨범의 콘셉트를 더욱 선명히 하는 곡이다. 리드미컬하면서도 감성 짙은 'Obliviate', 그리고 대선배 가수인 최백호와 양희은의 피쳐링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앨범의 성숙도를 높이는 데 일조한다.
사실 이 앨범을 통한 변신이 더욱 흥미로운 이유는, 기존 아이유의 색깔이었던 화사한 색감을 지우고 흑백으로 덮어 버린 틈을 타 아이유의 실제 감정과 자아를 들춰냈기 때문이다. 보다 직설적이고 성숙한 감성을 보여주고자 한 분명한 목적성이 있는 앨범을 내되 중간중간 자신의 이야기가 섞여 들어가도록 한 점은, 콘셉트와 앨범 자체에 대한 아티스트의 진정성을 어필하기도 하는 역할을 했다. 메시지에 힘을 더하는 가인의 피쳐링, 연습생 시절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싫은 날',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감성을 담은 '을의 연애', '우울시계', 'Voice Mail' 등을 통해 [Modern Times]에는, 단순히 모던한 콘셉트를 뛰어넘은 생명력이 실린다.
─ Best B-Sides: 을의 연애 (With 박주원), 누구나 비밀은 있다 (Feat. 가인 Of Brown Eyed Girls), 입술 사이 (50cm), Modern Times, 싫은 날, (Bonus track) Voice mail (Korean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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